세모의기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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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또 한해가 간다.
낯익은 제약회사 직원이 내미는 새해 달력뭉치에, 멀리떠나있는 친지들이 띄운 연하엽서며 성탄카드에 떼밀려묵은 한해는 제대로 작별인사도 나눌 사이 없이 서둘러 행장을 꾸린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대로 인쇄잉크가 묻어 날것같은 새해 달력을 받아들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됨은 비단 내 경우만은 아니리라.
나이탓인지,큰 욕심이 없는 탓인지 그저 요 몇년동안은 해가 바뀔 때마다 가족들 건강하고 탈없는 한해가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내 평생을 보내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법원이 좀더 발전하고 그속에서 내 직책에충실한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외엔 큰 소망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 가정과 내 직장이 망망대해 무인도속에 있는것도 아닌 바에야 어차피 세상사 희로애락을 돌아앉아 외면할 수야 없다.
대단한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가까이는 작금의 북괴금강산댐 소식이 그렇고,3O여년 의사로 살았으니 이런저런 의사와 관련된 우울한소식들이 또한 한해를 보내는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벌써 며칠째 책상 서랍속에서 잠자고 있는 친지들에게 보낼 연하카드에 새해의 기구를 담아 보내야 할텐데 .이 어려운 시대,내년 한해는 무슨 기도를 담아 보내야 하는지 망설여진다.
나이 어린 후배에게는 지금의 젊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그리고 그 젊음이 오래머물러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든 친구에게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우리들이해야할 일들에 대해 가슴 활짝 열고 말하고 싶기도하다.
진실만을 말하고 살아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기어렵다는데 돌아오는 새해일랑은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진실만을 듣는 한해가 되게하자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유대의 한 지혜로운 장님 이야기처럼 내눈이 안보여도 다른 사람이 어둠때문에 자신을 상하고 상대편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등불 하나를 켜들고 있는 마음가짐을 함께 가져 보자고말하고 싶기도 하다.
따지고보면 묵은 해와 새해의 구분 또한 사람의 마음속에 그어진 한 획일뿐.
일상의 변화가 크지않은 필부필부의 경우에야 소망이란 것도 그저 그런것들이지만, 그 필부의 계층이 단단하고 두터운사회야 말로 바람직한 사회이리라.따라서 지난해도 그랬듯이 다가오는 새해에도 우리네 「보통사람」 의 보통의 소망과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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