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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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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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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제목을 보곤 뜬금없다고 느낄 수 있겠다. 그걸 바랐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본명 대신 고향 이름(카라바조)으로 불리다 38세의 나이(1610년)에 요절한 천재 화가다. 미술 교과서에 등장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에 불과했던 그가 각별해진 건 11년 전 한 전시 때문이었다.

 어둠이 지배하는 방이었다. 빛은 오로지 그림을 향했다. 온전히 그림 속 빛 방향대로였다. 젊은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화들짝 놀란 듯 양팔을 벌린 초로의 인물도 있었다. 왼팔이 화폭 밖으로 튀어나오는 듯했다. ‘엠마오의 그리스도’다.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은 믿지 못했다.

 전시실 안엔 단 16점뿐이었다. 그럼에도 농밀했다. 한 줄기 빛과 그에 따른 극단적인 명암 대비, 성모 마리아나 성인(聖人)의 모델로 몸을 파는 여인이나 부랑아·하층민을 기용한 불경(不敬 혹 자연주의), 교황을 후견인으로 뒀으나 살인·폭력에 휘말려 도망자 신분으로 쓸쓸히 죽어간 개인사가 뒤섞여 아우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라바조-말년들’ 특별전은 실로 특별했다.

 최근 같은 곳에서 다시 카라바조전이 열리고 있다. ‘카라바조 이후’다. 카라바조는 기술적으론 완벽한 이는 아니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일군의 화가들에게 뚜렷한 영감을 줄 만큼 독창적이었다. ‘카라바지스티’들이다. 이번 전시의 주연들이다.

 카라바조의 작품들은 그 자신만큼이나 기복을 겪었다. 열풍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쳐다보지도 않겠다. 역겹다”(니콜라 푸생), “추함과 공포, 죄의 오물로 가득 찼다”(존 러스킨)는 비난을 받았다. 미움은 그나마 나았다. 곧 잊혀졌다. 다른 이의 작품으로 여겨지거나, 수백 년간 우피치의 다락방에 처박혔다.

 그가 재평가된 건 20세기 노력의 산물이다. 탁월한 비평가 로베르토 롱기에서 비롯됐다. 그는 “카라바조가 없었다면 렘브란트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들라크루아·쿠르베·마네의 그림도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카라바조는 이제 신비스러운 과거를 가진 천재 화가가 됐다. 미술계 록스타다.

 무료한 일상이 축복이란 것을 아는 나이가 됐다. 현실은 그러나 분노·우려·수치심·무기력감이 뒤엉킨 감정적 카오스 상태다. 당분간 벗어날 기미도 없다.

 그나마 이 글을 읽는 단 몇 분간만이라도 카라바조의 400년 역정에서 위로받았으면 한다. 비록 활자에서 눈을 떼는 순간 다시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터이지만.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다.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