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농민군 근거지 백산이 훼손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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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근거지였던 백산에 대한 종합적인 보존책이 시급하다는 소리가 높다. 학자·문인 등 동학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백산을 더 이상 방치해서 안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 백산은 산중턱의 조그마한 절인 백룡사를 사이에 두고 양쪽의 채석장에선 돌 캐는 소음과 먼지가 진동하는가 하면, 산속의 여기저기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고 산꼭대기에 우뚝 서있는 정자는 크게 훼손돼 있다. 전북지방기념물 31호로 지정된 백산성지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백산은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동산. 바로 옆으로 동률강이 흐른다. 높이가 겨우 57m밖에 안되지만 이 산이 유난히 높아 보이는 것은 주위가 온통 평야지대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면 일망무제로 동학당시 8개 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략의 요충지였다.
1894년3월 전봉준과 공화중은 제경구민·보무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이곳에 4천여 동학농민군(관군 측은 1만여 명으로 기록)을 집결시키니 본격적인 동학농민전쟁이 백산의 3월 봉기는 이렇게 시작됐으며 바야흐로 황토현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일설엔 당시 이 산이 흰 옷 입은 사람으로 가득 덮여있어 백산이라 불린다고도 한다.
이 백산에 돌 캐는 소리가 요란히 나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부터다. 그러나 백산익 채석은 멀리 일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시대에도 캐먹고 해방 후까지도 계속 캐먹어 백산은 그야말로 『이마가 깨진 산』이 되고 말았다. 부안군당국에 따르면 채석작업은 지난 78년 백산이 공원지구로 지정될 때까지 계속됐으며 그 후로도 20차례나 불법채취로 고발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군 당국은 최근 두 채석장(백산산업사·백룡석재산업사)에 산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조건과 도시고원 조성사업이란 이름으로 채석허가를 내주었다. 즉 두 채석장은 각각 2천만원 안팎의 공원조성비를 예치시키고 오는 91년 말까지 땅속의 돌을 계속 캐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민 이모씨(41)는 『백산이 사적지로 가꿔나가야지 공원으로 조성할 필요가 없으며 채석허가는 변칙행정』이라고 주장했다, 김모씨(45)는 『돌을 파내면 메워준다기에 도장을 찍긴 했지만 산을 버리는 것만 같아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백산은 현재 청원경찰 1명이 부안에서 출퇴근하며 관리 하나 제대로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향토사학자이며 『갑오동학혁명사』의 저자인 최현식씨(62·정주시)는 『군단위론 어려움이 많으므로 정부차원의 보존책이 강구돼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토와 민중』의 저자인 작가 박태순씨는 『백산은 대평야지대의 섬 같은 산』이라면서 『설사 동학관계가 아니라도 간직해야할 이 산에서 돌 구할 데가 없어 계속 파낸다는 것은 의도적인 국토 파괴가 아닌가』고 반문했다.
장편소설 『녹두장군』을 연재중인 작가 송기숙씨(전남대교수)는『동학농민전쟁이 군단위의 민난적 차원에서 전쟁적 차원으로 돌입한 것이 백산봉기 때부터』라면서 『현재 백산의 일부만 지정돼 있는 사적지와 보호지구를 확대, 백산을 중요사적지로 가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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