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서적 「홍수」문제 있다|성병욱(편집부국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대학가의 용공 벽보·비라, 유성환 의원 구속, 건국대 사건 등으로 공산주의 사상 오염문제가 국민적 관심거리다.
비단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계 일부 등 사회 저변의 사상 오염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해방후의 좌우익투쟁, 6·25 동란이란 민족 상잔의 비싼 댓가를 치르고 얻었던 반공으로의 사상통일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흔들리고 있다.
대학 교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학내의 용공·좌경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대체로 일치한다.
집회나 시위 등으로 현실 불만을 내놓고 표시하는 이른바 데모 학생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4가지쯤으로 성향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범주는 민주화와 자유, 그리고 반 독재를 요구하는 세력이다. 4·19나 6·3때의 맥을 잇는 측들로 자유 민주주의적 입장에 서있다.
두 번째 범주는 첫 번째 주장에 빈부 문제 등 사회 정의적 주장을 보다 강하게 내세우는 입장이다. 이상의 두 가지 범주는 내세우는 주장의 내용과 강도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가 체제의 혁명적 전복이 아닌 체제 내 개혁에 머무른다.
그러나 세 번째와 네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비록 지금의 체제가 민주화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체제로는 자기네들이 목표로 하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믿는다. 이들은 억압받는 세력의 역량을 집결, 체제 전복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적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세 째와 네 째 범주는 공통점이 있으나 혁명 투쟁 과정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분기점이 있다.
세 번째 부류가 북한 공산 집단과의 연계를 배제하는 반면, 네 번째 부류는 그 가능성을 인용한다.
60년대까지도 첫 번째 범주에 머물던 학생운동의 주의 주장은 두 번째, 세 번째 범주를 거쳐 이체 마지막 범주를 넘나드는 형편이다.
물론 세, 네 번째 부류에 속하는 학생은 비율로 보아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상의 4가지 성향이 구별하기 어렵게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반공에 컨센서스를 이뤘던 기성 세대와는 달리 젊은층 들 중에는 비록 자신은 좌경사상에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해 경계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꽤 있다. 적대 이데올로기로서 경계하기보다는 하나의 사상으로서 용납하려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북한 공산집단과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살아왔다는 현실을 도외시한 채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있는 서구나 일본처럼 공산주의를 한 소수정당의 이념 쯤으로 치부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가열한 현실과 동떨어진 이토록 안이한 생각들이 왜 생겨난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그 동안 몇 가지 대답이 있어왔다.
6·25의 민족 상잔과 그 전후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성장했다. 체험에 바탕을 두지 않고 머리로 하는 이들의 반공은 뿌리가 약해 흔들리기 쉽다.
또 4·19이후 계속되어온 반 독재·민주화 투쟁의 거듭된 좌절이 가져온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환멸과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한 사회적 모순이 겹쳐 급진 사상의 토양이 만들어졌다. 때문에 정치가 민주화되고 사회복지 노력의 증대로 사회경제적 모순이 축소돼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등의 대답이다. 분명히 근본적인 처방이 담긴 대답들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선 이에 더 해 당장 젊은이들의 사상 오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당면 문제들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데올로기 서적의 홍수 현상이다. 몇 년전 이데올로기 서적이 해금될 때는 공산주의 비판서적에 국한됐던 것이 지금은 본격적인 공산주의 이론과 역사 서적까지 버젓이 번역돼 서두에서 팔리고 있다. 소련·중공·베트남의 혁명 투쟁 역사, 인물의 전기들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또 공산주의 비판서란 이름으로 보다 좌파적 입장에서 볼셰비즘을 비판하는 번역서마저 나와있다. 이러한 저작들에는 이념적으로 오히려 보다 각고한 공산주의사상이 담겨 있다.
이데올로기 이론·역사서들은 공산주의 이론의 허점과 위험성을 알게 하는데 도움도 주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희미하게 하거나 나아가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호기심과 혁명적 낭만주의를 자극할 위험도 상당히 지니고 있다.
전문적으로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원서로 읽으면 될텐데 지금같이 아무나 서점에서 사상적으로 위험이 만재한 이러한 책들을 손쉽게 사 볼 수 있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남북의 상황이 개선되면 장기적으로는 자유롭게 모든 이념이 토론되고 논의되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선 많은 사람이 읽어도 좋을 이념서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적 입장에서의 비판서라야 할 것이다.
둘째, 남북 대화와 대 공산권 외교가 반공 의식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다.
남북 대화와 중공·소련 등 공산권과의 관계는 국가 유지 차원에서 불가피한 것이긴 하나 부지 부식간에 국민들의 반공 의식을 다소간 이완시키게 마련이다. 혹시라도 우리의 대공산권 자세가 지나치게 우호적이거나 덜 당당하게 비쳐질 경우 더욱 그렇다.
따라서 반공 의식 약화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남북 대화와 대 공산권 외교를 추진하는 자세와 홍보 방식도 정비되는 게 필요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