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닐」의 귀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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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 하원에선 역사상 처음으로 의장이 견책을 받은 일이 있었다.
입법부의 상징이며 존경의 대상인 의장이 국회의사당에서 당한 창피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토머스·오닐」의장이다.
그것은「오닐」의 발언 때문이었다. 84년 5월 그는 자기를 비난한 공화당의「깅리키」의원을 손가락질하면서『32년 동안의 내 의원생활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저열한 행동이었다』고 규탄했다.
그 발언은 인신공격이기 때문에 규칙 위반으로 규정되어 속기록에서 삭제되었다.
그 미국의「오닐」하원의장이 이번 주 고향으로 돌아간다.
34년간의 하원의원 생활과 10년간의 하원의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벌써「오닐」을 미국 정치의 40년대를 좌우했던「샘·레이먼」하원의장과 비견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미국 역사상 드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레이건」대통령이 매사에 어렵게 느꼈던 정치적 장벽도 실은「오닐」하원의장이었다.
「오닐」은 바로「레이건」시대에 가장 큰 정치적 변수였다.
진보적인 민주당 출신인「오닐」은 보수적인 공화당 출신의「레이건」을 사사건건 견제했다.
군비 증강, 니카라과 반군 지원, 사회복지 축소라는 정책을 편「레이건」은 늘「오닐」의 거구가 가로막는 것을 예상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가 남달리 가까웠다는 점도 재미있다.
85년 2월6일 연두교서 발표 때「레이건」은 의외로 따뜻한「오닐」의 지정을 실감해야 했다.
「오닐」은 커다란 생일 카드 두 장을「레이건」에게 선사하면서 그날 마침 74회 생일을 맞은「레이건」을 축하하자고 의원 모두에게 제의했다.
의사당엔 기립한 의원들이 함께 부르는『해피 버드데이 투 유』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정겨운 박수도 물결쳤다.
「오닐」은 컬러 TV시대엔 걸맞지 않는 구식 정치가란 평도 들었다.
생김새부터가 투박했다. 1백90cm의 장신에 몸집도 유난히 큰데다 성격마저 뻣뻣해서 도무지 세련된맛이 없다. 매사에 도전적이고 서슴없이 직설을 내뱉는 것이「오닐」이었다.
그래서「연방예산」이란 별명도 들었다. 다루기 어려운 인물이란 뜻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여론조사에선 그는 항상「레이건」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정치인으로 꼽혔고, 어느 누구보다 당과 하원을 잘 이끌어 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은퇴로 미국 국민은 한 시대의 거물 정치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미련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가는 거인의 그림자 속에서 더 풍부한 정치의 지혜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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