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국가 형별권이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법이 왜곡 적용되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 보장을 요구한다』 는 내용의 서울지방 변호사회 결의문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서 사법부의 역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극명하게 설파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재판을 하는 당사자가 신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어떤 재판결과건 완전 무결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러는 법 적용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무죄인 사람에게 벌을 주는 오판의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법부에는 공정하고 엄정한 재판절차를 통해 오판의 가능성을 최소화 해야할 책무가 지워져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의 재판에는 국가 형벌권의 행사가 공정성과 형평성을 잃은 사례가 너무도 많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적되어온 사실이다. 특히 정치적인 성격을 띤 사건일수록 법적용이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인상을 준 사례는 한둘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나왓으며, 강자에겐 무르고 약자에게만 서릿발같다는 비아냥마저 나왔겠는가.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관에 밉게 보인 사람이 저질렀을 때 법은 가차없이 그 잘못을 추궁, 유죄를 입증하면서도 이른바 「유력자」가 저질렀을 경우엔 못 본체 눈감거나 설혹 문제로 삼았다 해도 흐지부지 덮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음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해왔다.
법의 적용이 이처럼 형평을 잃는 풍토속에서 법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않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법부의 권위는 그 중립성과 공정성이 보장될 때라야만 가능하다.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어느 한족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그 권위를 존중받을 수는 없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승복도 받을 수 없고 설득력 또한 약화되게 마련이다.
요즘 논의가 한창인 개헌문제만 해도 그 핵심은 당연히 국민의 기본권이 되어야하고 이를 확고히 뒷받침하는 사법부의 독립에서부터 찾아져야 한다. 정부형태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권력구조가 내각중심이냐, 대통령중심이냐 보다는 오히려 행정·입법·사법부가 각기 제 본분을 찾아 견제기능을 다하느냐 여부에 있다.
특히 사법부의 기능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데 있으므로 정치적인 견해 때문에 왜곡되거나 편파적으로 운용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명제를 떠맡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이 70년대 들어서부터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와졌다는 세간의 평판은 우리의 정치상황에서 연유된다. 사실상 3권이 최고통치자 한사람에게 집중된 현실에서 몇몇 판사들이 정치적으로 외부의 입김에 좌우되지 않는 용기 있는 판결을 내리기는 했지만 사법부의 독립이란 보다 큰 대의에 비추어보면 역부족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민주화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 모두가 민주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중립성을 지키는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변호사회의 결의대로 국가형벌권이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법이 왜곡 적용되어 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행태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도 요구한다고 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법관들 스스로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는 노력과 함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의와 법리에 따라 실재적 진실을 규명한다는 자세를 가다듬어야만 법의 권위는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