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공기청정여과기 생산|천호기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초속 25m가 넘는 초강풍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샤워한 뒤 개운해진 마음으로 무진복 을 입는다.
또 한차례 에어샤워를 하고 나서야 클린 룸에 들어선다. 청정실, 이른바 클린 룸을 통과하기 위한 절차다.
천호기계(주)의 공기청정연구실-.
디지틀 숫자들이 점멸하는 커다란 전자레인지모양의 계기 앞에서 우주복 같은 무진복 차림의 두사람이 바쁜 손을 놀리고 있다.

<무진복의 클린룸>
윙윙거리는 기계 속에서 커다란 벌통같은 것을 꺼낸다. 잠시 꿀을 따는 작업을 보고있는 착각에 빠진다.
이 벌통모양의 물건이 바로 클린룸 유지에 빠져서는 안 되는 고성능 공기여과기 헤파(HEPA)필터다.
헤파필터는 온도·습도·기류·기압·청정도를 유지해야하는 환경에는 필수불가결의 존재. 따라서 반도체·식품·제약·사진필름공장은 물론 원자력시설·병원·유전자공학연구실·냉장·냉동설비등 용도가 무수히 많다.
이처럼 쓰이는 곳이 많고 3개월마다 갈아 끼워주어야 하는 헤파필터는 그 동안 국내에서 생산은 되어왔지만 거의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해 써야했다. 국산품의 성능이 미덥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작년 봄 이후 천호기계에서 고성능의 헤파필터가 본격 양산되면서부터 일제를 몰아내고 이어 지난 5월부터는 오히려 본고장인 일본에 수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수출 첫해인 올해 천호의 수출목표는 1억엔.
까다로운 일본시장에 진출하는데는 물론 뛰어난 품질과 성능의 뒷받침이 있기도 했지만 운 좋게 엔고 덕도 톡톡히 보았다.
작년 7월부터 국산 헤파필터가 국내시장에 대량 공급되기 시작하자 일본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덤핑공세로 맞섰다. 그러나 일본은 3개월이 채 못돼 엔화강세가 시작되면서 이를 포기해야했다.
일제에 비해 품질 면에 있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데다 가격마저 싼 국산필터를 찾는 내수물량이 크게 늘어서다.
이후 엔화강세가 지속되면서 국산의 가격경쟁력이 크게 좋아지자 마침내 일본이 이를 수입해 쓰기에 이른 것이다.
헤파필터는 원료인 유리섬유를 미국에서 들여와 일본에 수출하고 있으니 저 달러·엔고 덕을 이중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로부터도 주문상담이 잦아지고 있다. 그 동안 일본에서 수입해 썼는데 우리 쪽으로 수입 선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클린토피아」 건설 꿈>
종업원 98명에 자본금 3억원에 지나지 않는 미니기업 천호의 명성이 품질 하나만으로 이젠 동남아에까지 알려진 것이다.
지난 5월 일본의 첫 주문량은 2천만엔 어치였지만 이후 주문이 계속 늘고있는 추세인데다 내년에는 동남아지역으로 시장을 넓혀 올해의 3배 이상은 실어내겠다는 것이 천호기계의 젊은 사장 신현교씨(32)의 포부다. 멀지않아 전 세계를 이 회사의 상표대로 청결의 이상향인「클린토피아」로 만들겠다는 꿈이 만만치 않다.
신 사장이 이 회사를 세운 것은 75년 7월.
지금은 규모가 작긴 해도 「클린토피아」건설을 꿈꾸고있는 어엿한 기업체지만 당시는 청계천에 꼬마 하나만을 전화당번으로 앉혀놓은 보잘것없는 구멍가게였다.
21세의 어린 나이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해야했던 신씨는 중고필터용접기 1대를 집에 설치, 밤에는 중장비용 필터를 만들고 낮에는 가게에서 이를 팔았다.
그러던 76년 여름 한국야쿠르트 직원이 우연히 가게에 들러 플라스틱 사출기에 쓸 헤파필터를 주문했다. 처음이었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승낙, 보름간의 궁리 끝에 제작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중장비용 필터에서 산업용 필터로 품목을 바꾼 결과 장사가 잘돼 78년 영등포에 공장도 마련했다.

<「클래스10∼1」도전>
그러나 일이 순조롭지 만은 않았다. 이듬해 모 제약회사에서 주문 받은 1천만원 상당의 클린룸 설비가 불량으로 못쓰게 돼 버리는 등 손해를 보기도 했다. 필터성능을 사전에 점검할 테스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년간 주먹구구식의 생산을 해오다 지난해 3월 중소기업 진흥공단의 근대화 시설자금 2억 5천만 원으로 필터성능을 사전에 알아볼 수 있는 DOP 테스터를 들여놓고 나서야 품질에 완벽을 기할 수 있었다. 테스터는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지만 이 테스터가 국내에 들어올 경우 부머랭 효과를 염려한 일본이 팔지 않으려고 해 애도 많이 먹었단다.
테스터가 가동되면서 고성능 필터개발도 가능해졌다. 2백 56KD램을 생산하는 공정에 필요한 「클래스100」의 클린룸용 필터도 생산할 수 있게됐다.
「클래스 100」의 청정도는 1입방피트당 0·5미크론(머리카락 굵기의 1천분의 5)의 입자가 1백개 정도 들어있는 상태. 일반적으로 상쾌함을 느끼는 상태가 「클래스 30만∼50만」이며 무공해 지역이랄 수 있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청정도가 「클래스 10만」선이라 하니 어느 정도의 청정상태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천호는 고성능 헤파필터 개발에 만족치 않고 1메가D램의 제작공정에 필요한 「클래스10∼1」의 이른바 초고성능공기여과기 ULPA 필터를 한국기계연구소와 공동으로 개발 중에 있다. 공장도 영동고속도로 근처인 이천으로 옮겼다.

<이춘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