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중공의 공업 생산은 2·5배 늘어났다. 식량 생산은 1·5배, 소비재 생산은 3·1배, 자본재 생산은 2·5배, 에너지생산은 1·6배, 수출은 7O억 달러에서 2백73억 달러로.
중공의 한 농부는 말한다.『아버지는 꽃을 재배했었는데 10년 전 홍위대의 소박을 맞고 나서, 나는 품팔이를 나서야 했지요. 지금은 꽃을 재배하며 재미를 봐 2층집에서 냉장고와 컬러TV를 놓고 삽니다』(근착 유 에스 뉴스 앤드월드 리포트지)
9월9일은 모택동 사후 10년이 되는 날이다. 그 10년 동안 중공을 다스려온 등소평은 분명히 모택동의 분신은 아니었다.
모택동의 경제정책은 속칭『무쇠밥그릇』(iron rice bowl)정책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일하든 말든 밥을 먹여준다는 식이다. 그 결과는 모든 사람의 배를 불려주기 보다 모든 사람의 배를 평균하게 곯게 만들었다.「처칠」의 말마따나「빈곤의 평등」이다.
그러나 지금 중공 농촌의 빈곤인구는 1979년의 31%에서 6%로 줄어들었다. 또 요즘은 웬만한 농가에선 하루에 계란 하나씩은 먹는다.『획득재부 시광채적』등소평의 슬로건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다―.
오늘의 중공이 1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윤택해진 것은 바로 등소평의 「재부광채」정책이 가져온 결과다.
이른바 그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정책은 수요· 공급에 의한 시장경제 역할의 확대와 중앙 집중적 규제의 완화를 혼합한 경제정책이다. 따라서 가격통제를 풀어놓았고 그 결과 생산력이 오르고, 품질 경쟁이 가능해졌다.
모든 경제활동은「이윤추구」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또 제각기 자기가 할 일을 찾게 되었다. 자기 위치에서 일하면 일한 만큼의 보상과 때로는 보너스도 받을 수 있고, 힘들면 쉴 수도 있다. 중공의 생산성은 연5·5%씩 증가하고 있다. 유 에스 뉴스 지는 근대에 접어들어 그런 높은 생산성은 한국과 그리스밖에 볼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공의 그와 같은 변화를 두고『제2의 혁명』이라고 말한다.「문화혁명」다음의 혁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공엔 두 가지 고민이 있다. 하나는 82세의 등소평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미래의 고민과 빈부의 격차가 늘어가는 오늘의 고민이 그것이다.
앞서의 고민은 미국의 한 학자 말을 빌면『중공은 이미 강을 건넜다』뒤로 돌아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두 번 째의 고민은 자본주의적 고민이다. 오늘의 자본주의사회는 그것을 복지로 커버하지만 사회주의사회는 그것이 쉽지 않다. 역설적인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