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105세 여인의 주름에 새겨진 광기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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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9월 22~29일, 이하 DMZ영화제)가 폐막했다. 올해는 ‘평화·생명·소통’이란 주제 아래 36개국 116편의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이 중에서 국제경쟁 부문에 초청된 ‘어느 독일인의 삶’(원제 A German Life, 크리스티앙 크로네·올라프 뮐러·롤랜드 쇼르투퍼·플로리안 와이겐즈미어 감독)은, 나치 선전부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의 비서였던 브룬힐데 폼셀(105)의 증언을 기록한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DMZ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플로리안 와이겐즈미어(43) 감독, 비주얼 디렉터이자 편집을 맡은 스태프 크리스티앙 커머(30)를 magazine M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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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플로리안 와이겐즈미어 감독과 크리스티앙 커머. [사진 라희찬(STUDIO 706) 제공]

만년의 여인이 오래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기억을 더듬는다. ‘어느 독일인의 삶’은 나치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1930년대 후반 독일에서, 평범한 여성 폼셀이 괴벨스의 비서로 일하며 보고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폼셀 자신을 포함한 여러 독일인이 ‘어떻게 나치를 환영하거나 침묵하게 됐는지’에 대한 진술까지 고스란히 담았다. 유대인 친구를 차갑게 외면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정치에 대한 무지와 윤리 의식의 부재가 초래한 참혹한 근대사는 지금까지도 폼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어느 독일인의 삶’ 플로리안 와이겐즈미어 감독 & 비주얼 디렉터 크리스티

‘어느 독일인의 삶’은 오스트리아의 다큐멘터리 제작사 ‘블랙박스 필름’에 소속된 네 명의 감독이 4년간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와이겐즈미어 감독은 “과거사가 아닌, 우리가 사는 현재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예전 한 잡지사의 왜곡된 인터뷰 때문에 상처받았던 폼셀은 이 다큐에 출연해 달라는 제작진의 요청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1년에 걸쳐 보여 준 그들의 진심에 응하며 끝내 승낙했다. 평생 ‘나치의 조력자’라는 꼬리표에 시달린 폼셀은 카메라 앞에서 무척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보고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회고했다. 비주얼 디렉터 커머는 “관객이 오로지 폼셀과 그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시·청각적 요소를 적절하게 통제했다. 다큐 전체를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촬영하고, 음향·음악 사용을 배제한 채 클로즈업된 폼셀의 얼굴만을 집중해 보여 주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폼셀의 주름들은 마치 그가 관통해 온 역사의 굴곡을 그려 놓은 지도 같다.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 등에서 찾아낸 당시 희귀 영상 자료들이 그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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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라희찬(STUDIO 706) 제공]

이 영화에서 폼셀은 몇 번이고 “내가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시대의 광풍에 휩쓸려 타인의 주장을 따랐지만, 나치가 자행한 끔찍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 무관심했던 스스로에게 환멸을 금치 못한다. 와이겐즈미어 감독은 말한다. “내가 만약 당시 폼셀의 입장이라 해도, 그와 달리 나치에 용감하게 맞설 수 있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커머 역시 “이 작품을 만들며 비로소 나치에 협력했던 조부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두 사람은 “이 다큐를 통해 관객도 스스로 폼셀의 입장에 서서 같은 질문을 던져 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독일 나치에 협력했던 역사를 가진 오스트리아이기에,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추는 이 다큐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사회적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와이겐즈미어 감독의 철학은 단호하다. “사람들은 습관처럼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운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이 실수였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추악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야말로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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