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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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대두하고 있다.
어떤 사학자는『대한민국의 수립은 상해임시정부의 국가적 기능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임정27년 사는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으로 기산 되어야 한다』는 견해까지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직후인 1919년 4월13일 중국 상해 프랑스 조 계 안에 있는 노비로60번지 2층 허름한 건물에서 출범했다.
그때 참석자는 임시정부 의정원초대의장 이동령과 법무총장 이시영 등 독립지사들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선포 식에 앞서「대한민국」이란 국호와「대한민국 원년」이란 연호가 제정된 것은 사흘전인 4월10일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였다.
거기서 임정의 관제가 제정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책임제가 정해졌다.
그때 조소앙·남형우 등 이 만든 임시헌장 10개조는 우리헌법의 효시였다.
그 제1조가「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한 것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그때 성립된 민주공화제의 규정은 광복 때까지 5차의 개헌에도 불구하고 또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삼권분립 형태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법통성의 근거는 바로 거기 있었다.
뿐더러 임정은 그전에 있던 노령의 대한국민회의와 한성정부를 개헌을 통해 통합한 우리민족의 유일한 합법정부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노령의 대한국민회의는 3월17일에 설립, 21일엔 5개조의 결의와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했었다.
또 한성임시정부도 4월2일 인천의 만국공원에서 국민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를 선포한바 있었다.
그러나 상해임정의 의미는 그들 임시정부들을 통합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유지한 점이다.
동학의 시민혁명의식, 독립협회의 자립정신, 그리고 3·1독립정신을 이어 받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임정은 광복직후 국내계승작업에 실패했다.
「러시」미군정장관은 남한에서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뿐임을 강조했고 그 외세를 업은 일부 정치가들은 임정의 합법적 정부계승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지금 민족의 통일이란 지상목표와 민주화의 과업 앞에서 대한민국이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아야 할 필요는 더욱 커진다. 이번 광복절은 그 점에 유의하는 노력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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