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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하듯 서둘렀다."-독립기념관 설계책임자 김기웅씨에 듣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독립기념관의 설계자 김기웅씨(44·서울신사동588의19·삼정종합건축사무소대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치 달리기하듯 공사를 서두른 것이 문제였다.』
「민족의 성전」을 짓는 사업에 젊음과 명예를 걸고 지난3년간 매달려온 건축가는「서둘러 싸게만」지으려는 사업추진부서의 독주가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수사기관은 사고원인을 전공의 실수로 발표했는데 설계책임자로서 화재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화재는 분명 시공자의 실수로 일어났다. 그러나 좀더 넓고 깊게 생각해보면 우리모두가 서둔데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본다. 우선 3년안에 설계·시공을 마친다는 것은 벅찬 과제다.
한쪽에서 설계하며 다른 한쪽에서 시공하는 일이 2년간 계속됐다. 공사를 서둘러 착공하고 1년뒤에 건축허가를 받았다. 당국도, 추진위도, 건설회사도 마치 달리기하듯 서둘러왔다.
-또 다른 원인은 없는가.
▲공사비에 제한을 받았다. 이때문에 주요한 설계변경을 5∼6차례 했으며 여기에 많은 「주문」을 소화하다보니 설계가 대단히 복잡해졌다.
-항간에는 공기에 맞추느라 갖은 설계변경을 해서 사고를 빚었다는 말이 있는데.
▲설계변경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주요한 것만도 5∼6회되고 적은것까지 합치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주요설계변경이란.
▲본당주위에 너비6m, 길이 2백50m의 회랑을 만들게 설계됐으나 취소됐으며 본당앞에 대문과 삼문·담장을 치게 돼 있었으나 역시 취소됐다. 벽체는 모두 화강석을 쓰게돼 있었으나 시멘트옹벽을 치고 화강석으로 돌붙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밖에 기둥 2개를 빼냈으며 지붕의 기와를 당초 흙기와에서 동기와로 바꿨다.
-왜 설계가 바뀌었나.
▲회랑과 대문, 삼문, 벽체는 예산때문에 건립추진위측이 요구해 바뀌었으며 기와는 건물구조가 기와무게(총63t)를 견디지 못한다는 자문위원회 의견에 따라 바꿨다.
-설계변경과정에서 문공부나 추진위쪽의 압력은 없었나.
▲설계자는 명예를 걸고 자신의 작품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건축은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취사선택하므로 「정치적인 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관료조직의 완강함이란 정말 대단하다. 중도에 포기할까하는 생각도 몇차례 들었으나 오로지 국가대사라는 집념에서 계속했다.
-84년12월 세종회관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벽체를 시멘트대신 화강석으로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왜 시멘트에 돌붙임을 했나.
▲당초 설계는 화강석으로 돼있었다. 그러나 추진위측이 예산과 공기때문에 시멘트로 할수밖에 없다고 발표했으며 그후 반대의견을 참조해 화강석 돌붙임을 했다.
-당초 공기는 언제까지 준공하게 돼있었나. 86년인가, 87년인가.
▲설계를 의뢰받을 때부터 86년8월15일 완공이었다. 87년8월15일로 잡았다가 1년 당겼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설계에는 잘못이 없었다고 자신하는가.
▲기본설계·실시설계 모두 1백% 완벽하다고는 할 수없다. 그러나 지금도 설계에 하자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내 작품에 자부심을 갖고있다.
-기념관설계자로서의 심정은.
▲현상당선과 개관이라는 영광의 순간이 싹 사라지고 깊은 파멸감과 비통함을 느낀다.
이일에 집념하기 위해 일을 맡은 후 매일 새벽 부처님께 1백8번씩 절을 해오고 있다.
얼마전 미우주선사고때 사고원인은 샅샅이 밝혀졌으나 아무도 형사처벌된 사람은 없었다. 미국이 내린 결론은「다만 NASA가 일을 서둘렀다」는 것이었다.
설계변경이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지금은 모두 말할 수없다. 6개월쯤 뒤 민족의 기념관이 완공되면 설계에서 시공에 얽힌 뒷이야기를 털어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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