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무엇이 문제인가? (12)|정치 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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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개헌 정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합의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합의가 이뤄질 현실적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 위원은 최근 한 회견에서 연내 개헌이 되면 내년 초에 국민 투표를 실시하고 내년 말 또는 88년 초에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정치 일정을 말한바 있다.
물론 합의 개헌이 전제된 일정이다.
이민우 신민당 총재를 비롯한 야당 측에서도 합의 개헌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개헌 협상이 어느 정도 곡절을 거치더라도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내년 상반기에는 국민 투표 등 개헌에 필요한 절차가 완료돼야할 것이다. 다만 민정당 측이 통치권의 누수 현상을 막기 위해 대통령의 임기 시한에 임박해서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총선은 내년 연말에 바짝 다가간 시점에서 실시된다고 봐야한다.
원래 여야 합의대로라면 내년 상반기에 지방 의회 선거가 실시돼야 하지만 민정당 내의 지자제 연기 주장이 만만치 않고 야당 의원들도 현실적으로는 이에 동조하는 터이라 그 선거는 총선 후로 연기될 공산이 많다. 이미 상당수의 정치 지망생들이 총선 등을 전제로 하여 선거 전초전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정의 전제가 되는 정책 개헌에 대한 양측의 긍정적 태세는 다분히 당위론에 근거를 둔 것일 뿐이고 실제로 많은 정치인들이 보는 협상의 정도는 지극히 불투명한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아직 민정당의 개헌안이 정식 공표 되지는 않았지만 내각책임제적인 방향이 사실상 확정적이다. 이것은 직선 대통령 중심제인 신민당 등 야당의 주장과 정면으로 대립되어 그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국회의 개헌 특위가 곧 가동되더라도 거기서의 「토론」 이라는 것이 협상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네 입장을 국민에게 홍보하고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정치 선전의 성격을 띨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여야 고위 정치인들의 회동이나 막후 접촉이 아무리 활발히 이뤄져도 개헌 협상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면적인 개헌 내용의 대림도 있지만 재야와 김대중씨 그리고 이들과 김영삼 및 신민당의 관계가 개헌 문제의 가장 큰 현실적 변수로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견제 요인 때문에 신민당이 최소한 공식적으로 직선제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결코 보일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이미 민정당 측은 최근 마련한 「정국 운영 방향」에서 연내 개헌이 어려울 경우 내년 2, 3월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금년에 안 되는 협상이 내년 초에 이뤄지려면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것은 기본 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도 합의가 되지 않으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민정당 측이 현행 헌법으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점은 민정당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방식이든 개헌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선 첫째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민정당 개헌안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방법이다. 민정당 개헌안이 야당 측의 내막적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성립되면 국회 통과를 강행할 수가 있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야당의 상당한 세력을 가진 계파나 또는 다수를 규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수 있는 「내막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국회의 개헌안 표결은 기명 투표이다. 만약 직선제 반대에 가담한 결과가 다음 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되면 야당 측의 동조는 쉽게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야당의 다수가 동조할 수 있는 암묵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개헌안 자체를 절충하는 방법이다. 민정당의 내각제와 야당의 대통령직선제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각제에 대통령만 직선 하는 절충안도 나올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이 직선대통령중심제 주장파에게는 받아 들여 질 수 없겠지만 발췌 개헌식의 절충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두가지 경우 비록 내막적 합의가 일찍 이뤄지더라도 개헌안 자체의 국회 통과 등은 상당히 늦춰질 것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같은 양측 합의는 당내 반대파의 비판이나 재야의 견제가 사실상 별 쓸모가 없도록 총선 시기에 임박해서 이뤄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헌과 총선은 모두 내년 중반 이후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지방자치제 실시 문제는 자연스럽게 총선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여야 측 합의에 대처하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국회를 해산한 뒤 각자 개헌안을 내걸고 국민 투표적 성격의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 구성되는 국회가 개헌안을 만들게 된다.
이것은 재야 일각에서 요구하는 헌법 제정 국회 구성 주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민정당 의원들의 대부분은 이 방안에 대해 탐탁잖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방식에 따르면 조기 선거를 해야하고 여야의 치열한 공방 가운데 선거전만 극도로 과열될 것이며, 그 같은 감성적인 선거전에서 이성적인 개헌안을 호소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야 정치권이 개헌에 관한 합의를 끌어낼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면 정치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양외의 힘이 발언권을 행사하는 국면이 생길 우려도 없지 않다.
각 정당이나 정파가 그러한 충돌의 위험성을 내심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 그에 임하는 나름의 비장의 처방도 생각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서로가 반대파의 명분의 소진을 기다리며 가능한 압력을 모두 동원하여 그 한계점까지 밀어붙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총선거 실시에 필요한 시기에 임박해서야 시한의 압력, 여론의 압력, 그리고 무시 못할 외압에 밀려 결착의 단서를 찾아내지 않을까 추측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는 자칫 한가지 변수가 궤도를 이탈하기만 해도 정치권 전체가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심한 파동이 연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김영배 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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