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이중섭<7>「은지화 사건」이 치명적인 쇼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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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55년 환도 후 서울 미도파에서의 개인전 때 은종이그림 철거 사건은 피난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중섭에게 치명적인 쇼크였다.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고독했던 본인은 원산시절의 아내와 두 아들이 단란하게 지내던 것을 회상,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나체의 『가족헌화』 를 그렸던 것인데 이를 당국은 한낮 춘화로 단정, 50여 점의 그림을 철거명령 했었다. 이로 인해 중섭은 삶에 대한 의욕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입을 다물고 말을 않으며 어떤 음식이고 일체 거절했다.
마치 단식 자살을 기도하는 것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친구들은 할수 없이 의논 끝에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다. 몇 병원을 옮기다보니 중섭에게는 정신병자라는 딱지가 붙어버리고 말았다.
8·15해방 후 1947년 원산에서의 일이다. 소련 현역작가 전시회를 개최, 주최측인 소련대표들이 우리측 작품을 보여달라고 했었다. 중섭의 작품을 보고 「인민의 적」 이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술가는 어디까지나 인민의 봉사자이며 선량한 선도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섭의 그림은 인민에게 공포감을 주며 사물을 정직하게 그리지 않고 자기 주관에 의해 극단적으로 과장하기 때문에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때 그들이 본 중섭의 작품은 『투우』『투계』『군조』등 이었다. 굵은 터치로 힘차게 그린 것들이다. 성난 소, 성난 닭, 성난 까마귀 떼들이다. 그들의 논법대로 한다면 「피카소」 의『게르니카』 도 인민의 적이라는 범주 속에 끼어 들게 되는 게 아닐까.
이북서는 「인민의 적」 이라는 딱지가 붙었던 이중섭l.그가 대한민국에 와서도 은종이 그림 철거사건에 부닥치고 보니 중섭이는 확실히 설 땅을 잃은 것이다.
환도 후 서울에서 처음 수도육군병원 (신경과) 에 입원했다. 다음에 삼선교의 베드로 정신병원 (유석진 원장)으로 옮겼는데 상당히 진전이 있어 6개월쯤 되니까 제법 농담도 하고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병원에서 몇 번 탈출소동을 일으켰다.
명동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저물 무렵이면 내 방문 (혜화동 하숙집) 을 두드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유 박사와 상의, 조용한 정릉 산골짜기에 둘이 가 있어보기로 했다.
이미 그곳에 있던 박점석 내외가 우리 하숙집을 소개했다. 때는 늦가을, 중섭과 나와의 동거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은 부산남포동). 중섭이 이곳에 와서는 병색이 가셔 근처 언덕길 산책도하고 더러는 스케치도 했다.
겨울이 되어 방안에 갇히는 생활이 많아지면서, 더우기 일본에 있는 처에게서 편지가 날아오면 그날부터 우울증이 엄습해오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외출한 틈을 타 근처 막걸리 집을 개척해 놓고 몰래 한잔 들이켜고 오곤 했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여니 신문광고를 잘라 벽에 붙여놓고 나보고 보라는 듯 씩 웃고 있었다. 순간 술 냄새가 풍겼다. 그 당시 상영중인 『돌아오지 않는 강』 이란 영화제목이었다.
그 밑에 굵은 테두리를 쳐놓고 주위에 처 (남덕) 로부터 날아온 편지를 잔뜩 붙여 놓았었다. 『돌아오지 않는 강』과 바다건너간 아내의 편지…, 나는 코가 시큰해졌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거식증의 재발이었다. 밥상이 들어오면 젓가락으로 뒤적뒤적하다가 마는 것이다.
이웃에 사는 친구 (박고석·조령암) 와 그 부인들도 두통을 앓았다. 유 박사를 찾아가 상의도 해보았다. 계절이 바뀔 때 흔히 재발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때는 봄이었다. 이번엔 청량리 뇌병원(원장 최신해) 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링게르 주사약으로 살다 시피 했다.
처음에는 희망을 걸어볼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었는데 결국 이 병원에서 내과치료를 요하는 환자로 처방이 내러져 서대문 적십자병원(내과)으로 옮겨졌다.
중섭은 드디어 여기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1956·가을) -평소 「폴·발레리」 의 시를 읊고 술이 취하면 『낙화암 낙화암 너는 왜 말이 없느냐』를 잘 부르더니만….중섭은 우리민족 수난사의 표정이기도 하고 자신의 자화상 같은『소』를 많이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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