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질서보다 깊은 곳에 있는 장자의 ‘혼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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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28면

혼돈의 신 제강(帝江)

『장자(莊子)』에는 온갖 이상한 녀석들이 들끓는다. 몸길이 수천 리의 물고기 곤(鯤), 엄청난 크기의 새 붕(鵬), 수천 년을 살아온 나무 신령, 해골 유령까지 기상천외한 존재들이 이야기의 흥미를 더한다. 그래서 재미있다. 이상한 녀석 중 최고는 아마 혼돈일 것이다.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 존재다.


혼돈의 이야기는 이렇다. 남해의 신 ‘숙(?·빛살)’과 북해의 신 ‘홀(忽·깜짝)’은 중앙의 신 ‘혼돈(混沌·흐릿함)’네 집에 놀러 왔다. ‘혼돈’은 친구들이 찾아오자 기뻐하여 성대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혼돈’에게 자기들처럼 눈·코·입 등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기로 한다. 하루에 하나씩 뚫어주었는데 마지막 구멍이 뚫린 날 ‘혼돈’은 죽고 만다. 혼돈과 질서를 빗댄 비극적인 이야기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혼돈과 질서의 얼개가 보인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세계와 만난다. 오감(五感)에 들어오는 세계를 가지고 자아(自我)를 만들어낸다. 아기들은 냄새로 엄마를 찾고 젖을 먹는다. 젖먹이에게는 엄마가 전부지만 커가면서 세계도 넓어진다. 하지만 혼돈에게는 세계와 만날 감각의 창(窓)이 없다. 외부세계를 만날 수 없으니 내부에 자아도 생기지 않는다. 태아나 다를 바 없다. 구멍 다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들다. 세계와 나의 경계가 모호하기에 혼돈의 의미를 ‘흐릿함’으로 새기는 것이다.


우리는 ‘혼돈’이라 하면 무질서와 짝지어서 거부반응부터 일으킨다. 하지만 장자의 혼돈은 친절하다. 죽이기도 쉽다. 구멍이 뚫려 감각이 자리 잡으면 죽는다. 개인적 혼돈이나 사회적 혼돈도 그렇다. 혼돈은 세계를 만나지 못해서 생긴다. 깨어있는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혼돈은 없어진다. 반대로 눈을 감으면 혼돈은 살아난다.


장자는 우리 마음속을 바다로 비유한다. 동서남북으로 ‘숙’이나 ‘홀’같이 깨어있는 정신이 만드는 질서가 있고 가장 깊은 한가운데에는 모든 것이 섞여 흐릿한 ‘혼돈’이 있다고 보았다. 혼돈은 중앙에 자리한 신(神)이다. 인간의 정수(精髓)는 혼돈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혼돈을 부정적으로 보고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이 혼돈이고 모든 것의 핵심이 혼돈이기에 혼돈이 없어지면 핵심이 빠진 껍데기만 남는다.


세상은 창의성을 강조하지만 모순되게도 세상은 모든 것을 수량화하는 관리사회다. 창의성은 혼돈의 자식이라 눈·코·입·귀가 없다. 오늘도 관리사회는 여기에 구멍을 뚫어주고자 한다. 눈 없고 귀 없는 걸 이해하지 못해서다. 하지만 비극은 눈과 코가 달리면 더 이상 창의가 아니라는 데 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문서 채우기에 날밤을 새우며 죽어가는 창의적 혼돈이 슬플 뿐이다.


이호영


현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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