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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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유민은 홍진기 회장의 아호다. 시경에서 땄다.
『주는 오래된 나라이나 천명은 지금까지 새롭고 이제부터 번영해간다』(주수구방 기명유신).
이 구절 속의 「신」자를 「민」으로 바꾸었다. 『오로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홍 회장은 정말 「유민」답게 살았다. 약관 시절 10년은 사법고시 합격에서 판사와 대검 검사에 이르기까지 법조인의 생활이었고, 장년 10여년은 법무부 법무국장에서 법무장관·내무장관에 이르는 공직자의 생활이었다. 불혹 후반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20여년은 언론인으로 일관했다.
경성대 법문학부 조수시절 경성대 법학회 논집에 발표했던 『주식회사 합병에 있어서의 교부금』이라는 논문은 그 무렵 상법학회에서 일대논쟁을 유발했던 문제의 글이었다. 「다케다」(죽전생) 박사와 같은 일본 상법학계 석학이 『민상법잡지』를 통해 반론을 제기하고 홍 회장은 여기에 당당하게 반박했다. 25세 청년 법학도 시절의 일이다.
공직자 10여년의 생애는 호사가의 시절이었다. 법무부 법무국장 시절 미 국무성 「덜레스」고문이 작성한 대일 강화조약 초안에 우리 나라 조정이 누락된 사실에 주목하고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미국의 대일 강화조약 제12조에 귀속재산과 대일 청구권문제·재일 교포 문제 등을 삽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인연으로 한일회담 대표로 참가했다. 회담 중엔 「구보타 망언」의 정식사과를 받아내는 논쟁을 벌여 일본 신문에도 대서특필되었다.
법무장관 시절엔 『촌지 몇 푼으로 그 몇 천, 몇 만배의 국고 손실을 가져오는 부정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경세훈을 관가에 남겼다.
생애의 3분의1을 불사른 언론인으로서의 유민은 하나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언론은 모름지기 3대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 첫째는 「인포머티브」(신선한 정보), 둘째는 「에듀케이티브」(계도), 셋째는 「엔터테이닝」(흥미)의 조건을 가져야만 신문기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인포머티브 정신은 발로 뛰는 취재력, 머리로 생각하는 분석력, 문헌에서 새 기록을 찾아내는 발굴력을 뜻한다. 홍 회장 자신이 세계 신간 잡지의 탐독자로 그 열성은 젊은 기자도 뒤쫓아가기 숨이 찰 정도였다.
에듀케이티브 정신은 국리민복에 기여하는 애국심일수도 있고, 정론을 펴는 계도적 사명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유민은 「생각하는 언론」의 길을 철칙으로 삼았다.
엔터테이닝-, 신문은 논문 요약집일 수는 없고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지식상품으로서의 매력을 지녀야 한다는 지론이다.
지난 20여년은 우리 민족사에 유례없는 변환의 시기였다. 유민은 그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언론인의 대경대도를 꿋꿋이 걸으며 생애를 마쳤다. 비록 몸은 이승을 떠났으나 그의 언론철학과 유업은 길이 계승되고 발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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