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5역 연기하며 9년 지기 친구에게 6억 뜯은 40대 남성

중앙일보

입력

(피의자와) 연락이 안 되는디 우째야쓰까(사촌형 사칭, 전라도 말투)”

지시 받아서 처리 중이니까 좀만 기다려주면 처리해 줄낍니더(경기수원지검 계장 사칭, 경상도 말투)”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사투리를 써가며 9년 지기 친구를 속여 5년간 6억여 원을 뜯어낸 4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남성은 친구를 속이기 위해 서울중앙지검 검사, 서울중앙지검 계장, 경기수원지검 계장, 사촌형, 아는 형 등 1인 5역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사기 행각은 남성이 사칭한 검사의 실제 성별이 여성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들통 났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지인을 속여 50회에 걸쳐 6억2700만원을 빌리고 갚지 않은 혐의(사기 등)로 안모(41)씨를 구속했다고 13일 밝혔다. 안씨의 사기 행각은 2010년 8월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소규모 회사의 직원이던 김모(46)씨와 알게 된 후, “사회인 야구리그를 운영하려고 하는데 운영자금을 빌려주면 두 배로 갚아주겠다”며 2012년 9월까지 20회에 걸쳐 1억7500만원을 뜯어냈다. 하지만 안씨는 이 돈을 빚 갚는데 썼다. 일부 자금을 이용해 사회인 야구리그 사업을 벌였지만, 계속 적자만 쌓였다.

이후 김씨가 계속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자 안씨는 다른 속임수를 생각해냈다. 안씨는 자신의 통장에 9억 원이 들어있는 것처럼 은행잔액조회서를 위조해 김씨에게 보여주며 “통장에 9억 원이 있는데 형사 고발을 당해 계좌가 압류됐다. 이를 풀려면 돈이 필요하니 빌려주면 갚겠다”고 했다.

이 때부터 안씨의 1인5역 목소리 연기가 시작됐다. 안씨가 연기한 서울중앙지검 김모 검사는 인사 뉴스에서 이름만 본 사람이었고, 나머지 4명은 가상의 인물이었다. 5인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아는 형은 법무부 장관의 보좌관과 잘 알아서 계좌 압류를 은밀히 해지해 줄 수 있는 인물 역을 했다. 사촌형은 안씨가 잠적했을 때 안씨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요양 갔다고 알리는 역할이었다. 서울중앙지검과 경기수원지검 관계자는 자신이 연루된 형사 사건을 담당한 사람 역할이었다.

안씨는 한 개의 휴대전화로 두 개의 번호를 쓸 수 있는 ‘투넘버 서비스’도 이용했다. 혼자서 검사와 본인, 1인 2역을 하며 꾸며낸 문자메시지로 김씨를 안심시킨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안씨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30여회에 걸쳐 4억5200만원을 추가로 뜯어냈다.

범행은 김씨가 안씨가 연기했던 ‘김모 검사’를 추적하면서 들통났다. 3년이 지나도록 안씨가 돈을 갚지 않자 김씨는 직접 서울중앙지검에 전화를 걸어 김모 검사의 존재를 확인해보니, 김 검사는 여성으로 육아 휴직 중이었다. 지난 7월 초 김씨로부터 고소장을 접수받은 경찰은 안씨를 지난 5일 검거해 13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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