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여건성숙 기다려야하나|장을병<성균관대교수·정치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마당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안고있는 문제들은 수없이 많다.
민주주의란 일정한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서 실시해야 하느냐, 아니면 조건의 성숙과는 상관없이 실시해야 하느냐도 그러한 문제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 나라의 경우 집권세력은 일정한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 민주주의를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민주화추진세력은 조건의 성숙을 기다릴 필요 없이 민주주의를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상반된 주장들은 언뜻 보면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시차를 둘러싼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의 실현을 둘러싼 근본적인 견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일정한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 민주주의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민주주의의 실현을 유보하는 집권세력의 구실로 이용되어 갔고, 조건의 성숙을 기다릴 필요 없이 민주주의를 실시해야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갈망하는 민주화추진세력의 한결같은 소망의 표현이었다. 바로 이러한 주장들은 민주주의실현의 시차를 둘러싼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느냐 않느냐의 근본적인 견해의 차이였다고 하겠다.
실상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가 민주주의를 온전하게 실현하려면 일정한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주장이었다. 단적인 실례를 들어 「이 헌법에 의한 지방의회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를 감안하여 순차적으로 구성하되 그 구성시기는 법률로 정한다」고 한 규정 자체가 「재정자립도」라는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겠다는 발상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과연 민주주의의 실현은 일정한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일정한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서 민주주의를 실시해야한다는 주장은 바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한낱 목표로만 설정하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렇게 민주주의의 실현을 한낱 목표로만 설정해 놓고 조건의 성숙을 기다릴 때, 그 실현은 결단코 기대할 수 없는 신기루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알찬 실현은 조건의 성숙을 기다릴 필요 없이 주어지는 문제들을 하나 하나 민주적으로 처리해 나갈 때 비로소 기대해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문제들을 민주적으로 처리함으로써 과정을 민주화시킬 때 민주주의는 어렵지 않게 실현될 수 있다. 이래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있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앞서 민주주의를 실현한 나라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서 민주주의를 실시한 나라는 없다. 오히려 조건의 성숙과는 관계없이 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실현하기에 이른 나라들이었다.
영국이 오래 전부터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것은 조건의 성숙을 기다렸기 때문이 아니라 조건의 성숙과는 관계없이 민주주의를 실천했던 덕분이었다. 그런가하면 대립적인 종족들로 구성돼있는 미국이 조건의 성숙을 기다려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더라면 여지껏 민주주의의 실현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좀 더 비근하게 전후 일본의 경우나 인도의 경우를 보더라도 민주주의의 실현은 결코 일정한 조건의 성숙을 기다릴 일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근대화론자인 「마이런·위너」 도 『인간의 행동과 가치 사이에 모순이 빚어졌을 때 변하는 것은 대체로 가치 쪽이다』는 전제 위에서 『효율적인 민주제도를 수립하려면 상이한 의견에 대한 관용과 폭력보다는 협상을 채택하는 등 민주적인 가치가 우선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에 동조할 수 없다.…오히려 결사체를 구성하고 언론의 자유를 행사해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정책 결정자를 갈아치울 기회를 갖고 합리적·이성적으로 토의할 수 있는 기회를 향유하면 민주적인 가치나 행동은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위너」의 주장은 바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진통을 겪고있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마음 굳혀야할 일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길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다.
또다시 조건의 성숙을 구실 삼아 민주주의의 실천을 유보하는 비극만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따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