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년 전 백령도지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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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25 36주변을 맞아 휴전선 서북단의 ?도며 당시 격전지였던 백령도의 도지가 발견됐다. 약 4백년 전 70 고령에 모함을 받아 이곳에서 4년간 유배살이를 했던 설학 이대기(1551∼1628)가 써서 남긴 것이다.
그는 임란당시 곽재우장군과 의병활동을 폈던 인물.
그의 문집 『설학집』2책 중 제1책에 들어있는 것을 서지학자 이종학씨(수원거주)가 찾아냈다. 전국의 현존하는 도지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해 장연현 동으로부터 배서 수로 구식가량 ,떨어진 거리에 하나의 섬이 있으니 이것이 백령도다』로 시작되는『백령도지』는 총 2천 8백 70자 분량(15쪽).
형세로부터 국방·천문지리·수로의 원근·토산해물·초목·짐승의 유무·인삼·경관·기후·풍속에 이르기까지 안 더듬은 게 없을 만큼 자세하다.
전국에서 14번째 크기인 백령도는 특히 예나 지금이나 군사요충지여서 『적이 드나드는 문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대기는 백령도의 절경에 감탄,『돌칼이 천 길이나 높이 솟았고 안으론 돌문으로 통하는데 높이가 거의 세 길이나 되고 거기에 1백여명이 족히 놀 수 있는 터가 있다. 그 아래론 단물이 흐르고 차기가 서리 같다. 조석이 갈고 닦아 백석이 구슬같다. 그 기괴함을 뭐라 형용할 수 없으니 참으로 그 조화는 신의 장난이 아니냐』라고 적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백령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삼국시대엔 고구려 영토 혹도라 불렸으며 통일신라 이후 중국과 통하는 항로의 관문이 됐다.
고구려 때부터 백령도로 불리면서 군사적 거점인 진을 설치, 진장을 뒀으나 공민왕 때 왜적의 출몰과 수로의 험난으로 이곳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킨 후 점차 황폐해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해방의 요충지로서의 의미가 더해감에 따라 1609년 진이 설치되고 청사가 주둔했는데 이는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됐다. 또 아기엔 대규모 국영 말 목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백령도는 유명한 유배지였으며 유배자들은 이 섬에선 진 문화를 뿌리고 갔다.
백령도에 대한 자료는 20세기 이후 2편의 도지와 10여 편의 연구논문이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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