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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개성상인이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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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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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가을이 시작된 9월 초 아침, 청명한 소식이 들렸다. 무더운 여름의 기억과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한 방에 날린 신선한 쾌척이었다. 암행어사 격인 특별감찰관이 되려 오랏줄을 받는 막장 드라마, 거부(巨富) 수석이 쌓은 성곽의 뒷얘기가 정상인의 뇌를 가시넝쿨처럼 휘감아 어지럽던 차였다. 절대절망이라 할지, 정권 말기 현상이라 할지 아무튼 정상적으로 살고 싶은 보통 사람의 심사를 뒤집어 놓고야 마는 권력층의 격투를 준엄하게 꾸짖듯 사재 3000억원을 내놨다. 개성상인의 후예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 그의 말이 아름다웠다. “과학과 기술로 한국 미래를 개척해 달라. 혼자 하면 백일몽이지만 여럿이 하면 현실이 된다.” 법조계·경영계·관계 거물급 인사들이 빚어낸 온갖 잡탕 오물 때문인지 이 말 한마디는 진흙탕 연꽃처럼 피어났다.

 송상(松商)으로 불렸던 개성상인은 신의와 상도로 유명하다. 고려의 도읍 개성은 산세가 험해 경작지가 마땅치 않았다. 생계를 잇는 수단은 요즘 말로 물류와 유통이었는데, 인삼 재배와 홍삼 제조로 한반도는 물론 황해교역권을 구축한 개성상인은 억상책(抑商策)을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조선은 시장을 말리(末利)만을 추구하는 모리배들의 놀이터, 약탈자와 유식자(遊食者), 심지어는 명화적이 모이는 불온한 장소로 여겼다. 인구가 늘고 생산성이 증가하면 시장이 생기는 법, 개성상인들은 전국에 지점을 내고(松房) 행상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탄압과 감시가 심해지자 동업조합을 결성해 상부상조했다. 신용으로 자금을 융통하는 시변제, 환어음과 같은 신용전표, 원가와 매출액을 정확히 계산하는 복식부기법 개발은 사상(私商) 폐단을 엄금한 반시장정책의 대응물이었다.

 신의, 재투자, 상부상조라는 상도가 그렇게 배양되었다면 역설이다. ‘한길만 판다’는 이 억척스러운 기질은 외제 화장품인 코티분 전성시대에 우리 화장품 제조업체인 태평양화학을 탄생시켰다. 서성환 회장의 아호는 장원(粧源), ‘화장품의 원천’이라는 뜻이다. 유커를 홀린 K뷰티의 원동력이다. 개성의 아들, 신도리코는 죽으나 사나 오피스용품을 붙들고 있고,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고 끝내 우겨 결국 ‘과학’으로 승격시킨 에이스침대도 송상의 후예다. 남의 돈으론 장사 안 한다는 무차입경영 신조는 건전한 재무구조를 낳아 웬만한 금융위기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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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서울대 주우진 교수 연구에 따르면 한국 100대 기업 평균 부채율은 180%인 데 비해 계양전기·신도리코·한일시멘트·에이스침대는 20%를 밑돌았다. 송상은 대체로 구두쇠지만 요즘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냉혹하리만치 철저하다. 동업조합 혈통 때문인지 이윤의 상당 비율을 반드시 공익사업에 출연한다. 서경배 회장처럼 말이다. 자기 살을 깎아 공익사업에 내놓은 사람이 더러 있다. 이종환·정몽구·조창걸 회장이 그들이다. 그런데 가뭄에 단비라고 할까, 각박한 요즘 세태에 경제시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시대적 책무, 견위수명(見危授命)을 솔선하는 것이 눈물겹다.

   견위수명, 위기 시에 생명을 내놓는다는 공자의 말을 노학자 송복 교수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로 풀었다. 한국사회는 역사적 동력을 잃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송복 교수는 특권층의 책임감 회복 외에는 답이 없다고 최근에 쓴 책 『특혜와 책임』에서 결론지었다. 국가에 기대를 거는 시대는 지났다. 시민사회가, 그것도 특혜를 받은 지도층이 책무와 희생을 솔선해야 신동력이 생겨난다고 대갈했다. 뉴하이(당대 출세자), 뉴리치(당대 부자)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노학자의 당부를 무릎 꿇고 새겨야 할 사람은 약 1만5000명에 이른다.

 위세 고위직층 2907명, 근접부 고위직층 7236명 해서 지도층 교양시민 약 1만 명과 자본가층 5000여 명이 그들이다. 좀 넓게 추산하면 총가구의 1%, 약 11만 명이다. 당대에 출세하고 부자가 됐기에 권력의 윤리와 돈의 철학을 익힐 시간도, 기회도 갖지 못했다는 것이 한국의 최대 약점이자 만병의 근원이다. 천박 상층에 의한 천박한 지배, 지난여름 그렇게 당했고 가을 내내 당할 이 망국 드라마는 성문 닫고 사다리 걷어찬 뉴하이와 뉴리치의 몰역사성, 몰이타성에서 발원한다.

 정치만을 탓해 소용이 없다. 국회의장 발언에 집단 농성을 마다하지 않는 여당, 국회 개막도 전에 사드 문제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는 야당 모두 상대 진영을 초토화할 신무기 개발에 여념이 없다. 청와대 지침을 수행하기 바쁜 모범생 국무회의, 남은 1년 반 토굴생활에 진입할 관계(官界)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권력·위신·돈을 독점한 교양시민과 경제시민이 자신의 내부에 공익적 유전자가 살아 있는지를 우선 점검할 일이다. 자신이 누린 특권을 사회에 보답하고 있는지를 엄중히 짚어야 할 때다. 상업을 모리배의 말업(末業)으로 경멸한 조선에서도 개성상인들은 그리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