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대토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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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울대 도서관 6층의 23일 하오 4시 20분. 책걸상을 한쪽으로 치워 버린채 1천여 학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대학의 성역(성역)이라는 도서관이 「민주제개헌과 민족자주화를 위한 시국대토론회」라는 대중집회의 토론장.
애국가 제창에 이어 시작된 토론회는 7시 40분까지 3시간 20분간 계속됐다.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을 명심하자.』
30대로 보이는 「장위동에 사는 한 시민」의 발언에 청중들은 야유도 섞인 폭소와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를 보냈다.
『광주사태의 책임이 미국과 현 정권 중 누구에게 있는지 발표자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광주사태 당시부터 반미(반미) 구호가 나왔다는 말은 발표자가 잘못알고 있는 부분이다』 총 학생회 대표의 주체발표에 이어 학생들의 열띤 토론이 계속됐다.
『한국현대사가 미제국주의와 싸움이라면, 왜 지금에서야 반미구호가 나왔나』
『해방이후 계속돼 온 반미의식이 성숙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북한사회를 어떤 사회로 규정하는가』
『어릴때부터 주입식으로 받아 온 반공 교육 자료밖에 없어 분명한 대답이 어렵다』
『학생운동의 한계는 무엇인가』『대답에 많은 시간이·필요할 것 같으니 개별적으로 찾아와 이야기하자』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자 일제히 일어섰던 학생들은 외부인사의 말을 듣는 순서로 토론을 진행시켰다.
유시춘씨(36·84년 서울대 복학생 대책위원장·유시민군의 누이)가 『분열은 적이 좋아하는 것이니 민민투와 자민투는 빨리 단압해야한다』고 말하자 학생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곧이어 총 학생회 전 회장 김민석군의 어머니 김춘옥(51)씨가 『나는 여러분의 어머니자격으로 여러분을 꾸짖기 위해 왔다』며 등단하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화염병도 분신도 모두가 폭력이다. 여러분은 고귀한 목숨을 아껴 이 겨레를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싸워달라』는 김씨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서면서 『우리는 민주화와 평화를 원한다』『우리는 폭력은 싫어한다』는 우레 같은 구호와 박수를 보냈다.
3시간 20분간의 토론을 끝낸 학생들의 표정은 밝고 진지했다.
그러나 당국의 과잉 반응 때문이긴 했지만, 한때 「성역」을「점거」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듯 겸연쩍은 기색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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