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처럼 큰 교육은 없다|이명현 <서울대교수·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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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필리핀의 민주화를 위한 몸부림이 한창 고조되어가고 있던 때, 한국의 어느 신문에 27세 된 청년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대목이 실려있는걸 읽은 적이 있다. 그 청년의 이름은「환·폰세·엔릴레」주니어다. 이 청년의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그의 아버지는 당시의 필리핀 국방상직을 담당하고 있던「엔릴레」장관이다.
신문에 실렸던 편지의 한 대목은 이렇다. 『아버지 저는 「마르코스」와 같이 위대한 인물이 국민의 의사를 속이기 위해 어쩌면 그렇게도 비열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기회가 왔는데도 진실의 편에 서지 않고 있다면 앞으로의 세대가 그 같은 비열한 행동을 모방하고서도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27세의 젊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이 한 대목을 읽고 한참동안 망연자실하였다. 그리고 오늘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얼굴들이 나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외쳐대는 함성이 나의 귓전에 울려왔다. 그리고 나서 나의 초라한 몰골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나이는 이미 『당신들 뭘 하시오』라고 꾸중을 들어야할 세대에 진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역사적 상황이「위기」라는 언어로 표현되기까지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은 어쨌든 젊은 세대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 없다. 그들은 오늘 이 역사를 만든 장본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몸짓과 함성은 오늘 우리의 역사가 당면한「위기적 상황」을 알리는 「경보 사이렌」이다. 경보 사이렌을 탓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일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그 경보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거기에 알맞는 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그것이 세상을 안다는 어른들이 취할 현명한 자세다.
우리 속담에 『언 발에 오줌싸기』라는 말이 있다. 발이 꽁꽁 얼었으니 따뜻한 기운이 필요하다하여 체온이 가득한 수액을 동원하는 것이「구급대책」이라고 생각될지 모르나, 결국 그런 대책은 언 발을 더욱 더 무섭게 얼게 하는데 도달되고야 만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 그 속담에 담겨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나는 바로 우리의 저 속담의 교훈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마련하는 1회용 처방들만 풍성한 것 같아 정말 무거워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그런 미용적 처방 가지고는 풀리지 않을 상황이라는 것을 오늘의 역사를 주무르고 있다고 자처하시는 분들은 깨달아야 한다. 수술을 「해야될 때」를 넘긴 환자에게 남는 가능성은 「죽음」뿐이다. 지금 이 나라는 수술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고 장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수술은 필요한 때에 해야한다.
때를 넘기고 나면, 아무리 기술이 좋은 명의가 나선다 해도 끝장을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땅은 한국사람 모두에게 소중한 삶의 둥지다. 어느 누구의 무엇을 「위하여」이렇게 되어도 저렇게 되어도 좋은, 그런 거지쪽박과 같은 것이 아니다. 정말 소중하게 간직되어야할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이다. 이 삶의 터전에 찾아온 역사의 과제가 바로 민주화다.
지금 이 땅위에 열화처럼 일고있는 「민주화의 열망」은 그리 한갓된 유행이거나, 술수나 요술로「넘기고 지나갈수 있는」그런 한때의 일이 아니다. 「겉과 속이 같은 진짜 민주화」의 성취만이 우리의 삶의 보금자리를 보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오늘 이 땅의 아버지들은 젊은 아들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거친 몸짓들과 언어에 몹시 당황하고있다.
아들은 아버지에서 태어난 인과의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오늘이 땅의 젊은 아들들에게서 나오는 몸짓과 언어의 까닭(인)은 아버지들의 몸짓과 언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과적 세계의 이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의 백성들은 일찌기 저 인과의 이치를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나는 학생과 선생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만 여태껏 살아온지라 「교육」이란 말만 들어도 귀가 쫑긋한다. 그런데 가끔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쓰는 덕분에 받게되는 격려의 편지와 위협의 편지에서 읽게 되는, 『너 선생이란게 그따위 소리하니 애들마저 그러지 않느냐. 교육 좀 잘해라』라는 충고의 말씀을 가슴아프게 받아들인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거친 몸짓과 언어에 목도하여 당황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우리 같은 소위 교육자에게 꾸짖는 말씀에 무어라 사과의 말씀을 올려야할지 모르겠다. 선생질 제대로 했다고 장담하실 분들이 안 계신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숨김없는 고백이다.
하지만 선생이 본업인 나로서 가끔 선생다운 이야기를 시도해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내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글쓰기와 같은 허탈에 빠지게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의 「거대한 판」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역시 정치의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당위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다. 정치처럼 큰 교육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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