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문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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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전 한 전직 의원이 사망했다. 어느 신문이 그의 부음을 보도하면서 『독립운동가로…만주에서 항일운동들 하다 해방후 귀국』했다고 소개하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 그 사람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은 커녕 봉천 일본육군 특무기관이 설립한 산하 사상공작단체흥아협회의 사무장을 하던 사람이다.
그는 또 재만 독립군 토벌작전을 측면 지원한 「동남지구 특별공작 후원회 본부의 상무위원이었던 사람이다. 이 자격으로 그는 만주에서 진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에 투항 권고의 삐라까지 살포하였다.
일제 밀정단체의 실무 책임자였던 사람이 독립운동가요 항일운동을 했다고 소개되다니, 어디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근일에는 한 시인의 시『오감도』가 그의 아내였던 사람에 의해서 항일시라고 주장되었다. 도대체 어쩌자고들 이러는가? 「항일」의 전력이 아무리 엿장수 엿목판으로 타락했다손쳐도 이건 좀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일본문으로 쓰여진 「항일시」 라는 것도 있는가? 일제하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시 『오감도』 는 대학노트에 깨알처럼 써졌던 일문시 2천점 중의 15점을 한역해서 발표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 제4호』와 『시 제5호』는 원작인 일문시 그대로가 『조선과 건축』 1932년 7월호에 『진단0·1』및 『이십이년』이란 표제로 발표까지 된 적이 있었다. 『오감도』15편의 하나로 조선중앙일보에 재녹된 것은 그 2년 후인 34년 7월이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가 뛴다는 속담이 있다. 어중이 떠중이가 「항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바람에 숭고해야 할 항일만 엿장수 엿목판처럼 되고 말았다. 지하에 계신 진짜 항일투사들이 창피해서 항일의 문패를 떼어내야 할 판이 된 것이다.
이건 항일을 망치고, 우리 자신을 망치고, 자손대까지를 망치는 일이다. 항일과 극일을 외해서는 항일을 값싸게 팔아먹으려드는 고약한 습성부터 고쳐야 한다. 항일의 전력은 보다 확실한 고증과 투철한 양심을 전제로 해서 소개되고 주장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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