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정리 정부가 앞장서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원래 부실기업정리라는게 모양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인데 모양 좋게 하려니 구멍이 생기고 선후가 틀리는 것이다.
우선 타이밍부터 그렇다. 이제라도 막상 시작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좋지만 좀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훨씬 좋을 뻔했다.
부실기업문제가 어제오늘 일어난 것도 아니고 손쓰는 것이 늦을수록 손해도 커진다는 것을 모를리 없겠지만 그걸 탁 깨놓지 못하고 하는 듯 안하는 듯 모양 좋게 하려니 적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정부가 부실기업문제에 본격적으로 손댄 것은 작년부터다. 그전에도 생각들은 있었겠지만 『내 재임 중에 부실기업을 파헤쳐 흉한 꼴을 보일 필요가 있겠느냐』하는 모양론이 앞서 적당히 풀칠이나 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작년엔 도저히 더 넘길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염치 불구하고 조감법을 고치고 한은 특융을 부활했다.
기왕지사 그렇게 됐으면 팔 걷어붙이고 서둘러야 했는데, 손끝에 물 퉁기며 고상하게 하려다보니 일이 덧나버린 것이다.
모든 일엔 크고 작고, 급하고 덜 급한 순서가 있다.
부실기업이야말로 가장 급하고 또 전력을 경주해도 될까 말까한 일인데 모두들 폼잡고 있으니 일이 될 턱이 없다.
모양 갖추는데는 최후까지 집요하여 뒤늦은 부실정리도 대한중기와 풍만제지부터 시작한다. 다른 더 급한 것들이 많지만 제일 문제없고 모양 그럴듯한 것을 골라 선두주자로 내세운 것이다.
부실기업문제는 초기단계에서 손을 썼더라면 작은 고통으로 수습할 수 있었겠지만 정부·은행·기업이 서로 미루고 어름어름하다보니 이젠 보통방법으론 도저히 손댈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버렸다. 간염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 간암으로 악화된 것이다.
부실업체들이 대부분 중동에서 당했는데 처음 돈 좀 벌었을 때 조심하지 못하고 왕창 더 벌려다가 되레 물린 꼴이 돼버렸다.
손해가 나니 본전생각이 나 더 큰 무리를 하게되고 더 큰 무리는 더 큰 손해를 가져왔다. 나중엔 정신들이 확 뒤집혀서 손익을 안 따지고 일을 벌이고 안 쓰러지려고 사채든 달러 빚이든 마구 끌어다 썼던 것이다. 기업경영이라 할 수 없는 최후의 발악 같았다.
해운이나 종합상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도 대한중기나 풍만제지 같은 제조업은 시설이나마 남아있지만 해외건설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다. 손해규모도 어마어마하다. 그 부실 경영의 뒤치다꺼리를 몽땅 은행이 뒤집어쓴 것이다.
국내외에 대한 체면 때문에 내몰라라 할 수도 없고 은행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부실기업에 돈을 쏟았는데 그러다 보니 은행이 부실이 되어 한은에서 특융이란 것을 만들어 구제금융을 해준 것이다.
기업부실이 은행부실로 전가되고 그것을 한은특융으로 메웠으니 결국 돈 찍어 부실을 갚아주고 있는 셈이다.
처음부터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왕 일이 벌어졌으면 빨리 수습하는 것이 손해가 적다. 일돼 가는 뽄새를 보아 정부가 빨리 나서야 하는데도 금융자율화니 시은민영화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며 고상하게 굴다가 일을 더 망쳐버린 것이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손해를 얼마큼 줄이느냐다. 모양이고 염치고 찾을 형편이 못된다.
60년대 말에도 한번 부실기업정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땐 아예 청와대에 「타스크 포스」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또 공개리에 일을 처리했다. 유관기관이 모두 모여 강력한 힘을 갖고 밀어붙이며 부실기업의 상황이 어떤지, 앞으로 어떤 기준에 의해 어떻게 할 것인지도 밝혔다. 그 권위도 대단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부실이 커지고 복잡해졌는데도 『은행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으로 여유 있게 나오고 있다. 흙탕물에 발을 안 넣겠다는 것이다.
부실규모가 3조란 말도 있고 4조란 말도 있는데 아마 어느 누구도 정확히 모를 것이다. 어떻게 계산하느냐로 금액이 다르고, 또 앞으로 수습하기에 따라 더 줄었다 커졌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관계도 마찬가지다.
본래 책임은 기업을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에게 있겠지만 그렇게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고 그걸 일찍 수습 못한 책임은 정부·은행 등 유관기관에서 줄줄이 져야한다.
그걸 아무도 책임이 없는 것으로, 또 별일 아닌 것으로 처리하려니 돈은 돈대로 들고 일은 일대로 안되고 있는 것이다.
다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직접 나서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은행에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늦을수록 손해가 커진다. 지금 모양 찾다가 시기를 놓치면 무척 흉한 꼴을 당하기 쉽다.
어디 부실기업문제 뿐인가. 요즘 일대처하는 것을 보면 사태를 앞질러가지 못하고 항상 쫓기는 통에 애는 애대로 쓰면서 일은 안 풀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초기단계에서 서로 미루지 말고 확 달려들어 근원을 고쳐야 하는데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가 나중 더 큰 낭패를 당하는 것이다. 개헌·학원·노사문제 등에서 비슷한 패턴이다. 그래서 항상 안 터질 사건들이 터지고 허둥지둥 쫓기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선 욕먹는 것을 개의안한다는 의욕적이고 소신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많다는데 막상 그것이 가장 필요할 땐 없으니 이것도 국운인가. 【최우석<편집 국장대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