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산조 명인 김난초여사|남편·자녀없는 고독한 여생…후진 육성에 힘 쏟지요|일본인 문하생등 제자 100여명 길러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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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사직동의 좁은 골목길을 뱅뱅 돌아 오래된 한옥에 도달했을 때 가야금 산조의 명인 죽파 김난초 여사(75)의 가야금 타는 소리가 은은히 새어 나왔다.
『내 가락이 유달리 처절하고 애련하다는 얘기를 듣지요. 한많은 인생이 손끝에 그대로 전달되는 모양이죠.』가야금산조의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김씨는 「남편 없고 자식 없는 외로운 여생」을 남김없이 가야금에 쏟아 넣고 있다고 말한다.
가야금산조의 창시자인 고 김창조씨의 친손녀로 8세때 가야금을 타기 시작한 그는 이미 16세 때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20세 전후해 인사동 조선극장 무대에 섰고 태평레코드에 취입도 했다.
그러나 22세에 결혼, 「완고한 남편」과 사별한 67세까지 45년간 가야금에서 손을 떼야했다.
다시 가야금에 손을 대기시작한지 1년만인 1979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은 그는 스승이었던 한성기씨의 류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죽파류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경쾌한 강산조보다는 엄숙하고 애조를 띤 우조와 계면조를 주로 써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 등으로 이어지는 산조한바탕을 타고나면 인생살이의 희로애락이 물거품처럼 느껴집니다.』「밖으로 나서는 게 싫다」는 그는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만 하루 6∼7시간씩 조용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까지 그를 찾아온 문하생을 위시해 문화재 전수생·이수자등을 합해 모두 1백여 명의 제자들을 이미 길러냈다. 『시작이 반이예요. 어떤 일이든 긍지와 인내를 갖고 꾸준히 노력해야 결실을 얻습니다.』이렇게 말하는 그는 그러나 제자들에겐 『남 앞에 턱턱 나서는 되바라진 여자보다는 단정하고 겸손한 여자가 될 것을 우선적으로 가르친다.』고 말한다. 『세상을 둥글게 원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상대방의 얘기를 충분히 듣고 스스로 잘못을 교정하는데 신경을 썼습니다.』
『실속보다는 우선 내세우고보자는 식이 대부분인데 그 허황됨이 얼마나 낭비이며 진실을 잃게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이름없이 살다 이름없이 가는 것이 편해 인간문화재 지정도 망설였다는 그는 열심히 죽파류 가야금산조를 이어가는 제자들이 그저 소중할 뿐이라고 덧붙인다. <고혜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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