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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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처」 영국수상은 어디로 보나 이단이다. 타협을 존중하는 영국류의 보수정치 풍토에서 그는 「막무가내」의 정책으로 오늘까지 7년 집권을 계속하고 있다.
탄광노조가 1년을 두고 한사코 스트라이크를 풀지 않고 있을 때도, 에이레 공화군의 테러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해도 이 「철의 여 수상」은 탱크처럼 버텨냈다. 82년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도 그가 해낸 일이었다.
최근엔 원유가 하락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북해 원유의 생산삭감 요구를 받았다. 「대처」는 이것을 차가운 말 한마디로 거절했다.
『시장의 문제는 시장에서 해결해야지요. 』
그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전후 최초의 「머니터리스트 정치가」라고 말한다. 그런 평판을 스스로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대처」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케인즈」가 영국인을 게으름뱅이로 만들었다. 』
영국이 낳은 세기적인 경제학자「케인즈」는 『임금 인하는 유효수요를 줄여 고용과 생산고를 감소시킨다』 는 이론을 제시했었다.
영국병이 바로 만성적인 노조쟁의에서 비롯된 것을 생각하면 「대처」의 그 한 마디는 이해가 간다.
지난 정초엔 영국민의 43%가 그의 사임을 요구할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일도 있었다. 도산 위기에 있는 영 헬리콥터회사의 합작문제로 빚어진 내각 불화가 화근이었다.
그때도 「대처」 는 TV에 나와 『나에겐 물러설 때를 판단할 능력이 있다』 고 일갈했다.
그의 확고한 리더십과 정치적 신념은 「작은 정부」 의 모토와 함께 국유기업의 민영화, 정부의 각종 규제 완화를 실현했다. 그 결과는 두자리 수의 인플레를 한자리로 끌어내리고 20년만에 3%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의 경제정책을 두고 「대처리즘」이라는 보통명사를 붙여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철인의 모습은 외교에서도 나타났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대처」는 런던주재 소련대사관에서 열리는 「레닌」 혁명 기념 리셉션 참석을 거부했다. 「브레즈네프」사망 때도 런던의 소련대사관 빈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엔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공중 공격을 지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서방지도자 가운데 그와 같은 일을 내놓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클랜드 전쟁 때의 미국 지원을 갚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대처」야 말로 리더십이 확고한 지도자고, 영국이 그런 지도자를 가장 필요로 할 시대에 그가 수상이 되었다.
5월 신록속에 한국을 찾아오는「대처」 수상은 그런 점에서도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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