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금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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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다방의 고향은 멀리 이스탐불이다. 1551년「카페」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원래 카페란 프랑스어로 코피라는 뜻이다.
정작 서방에 다방이 등장한 것은 그 1세기 뒤의 일이다. 1652년 런던에, 이태 후에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1669년 뉴욕에.
미국 최초로 뉴욕에 생긴 다방 이름이「런던 코피 하우스」였던 것을 보면 미국이 코피를 어디서 수입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미국에서 코피를 주로 파는 다방은 보기 어렵다.「드러그·스토어」는 약국인데, 한쪽 구석에 테이블을 몇 개 놓고 코피를 판다. 일명「소다 파운틴」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코피를 파는 다방이 처음 생긴 것은 조선 왕조 말기 고종 때다.
그 무렵 러시아공관에 손택이라는 독일계 여인이 있었는데 고종을 극진히 위했다. 이 여인은 나중에 고종의 도움으로 손택 호텔을 열면서 그 안에 다방을 차려 놓고 코피를 팔기 시작했다.
그후 3·1운동이 지나고 일본인이 서울 명동에「멕시코」라는 다방을 열었다. 그 시절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방에 드나드는「조선 문화인」이면 대충 인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상 같은 문화인이 다방을 개업했던 일도 있었다. 1933년 7월14일 서울종로1가에서 문을 연「제비」. 그 이듬해 역시 종로1가에「식스 나인」(69)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다방을 열어 화제가 되었다. 모두 영업으로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에피소드는 많이 남겼다.
해방되던 해 서울 명동엔「봉선화」라는 다방이 등장했다. 물론『물밑에선 봉선화야…』 의 이미지로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그때의 다방이라니 벽엔「베토벤」의 데드 마스크가 걸려 있고, 음악은「베토벤」의『교향곡 9번』과「리스트」의『헝가리무곡』, 그리고『봉선화』노래가 전부였다.
그러나 해방후의 다방 풍속으로는「마시는 장소」이기 보다「만나는 장소」의 구실이 더 컸다. 사람들의 사회활동이 넓어진 것이 그 첫째 원인이라면 고급 룸펜이 많았던 것도 둘째 원인쯤 되리라. 그 어느 쪽이든「만남의 장소」라는 데는 그 나름의 뜻이 있었다.
보사부는 그「만남의 장소」인 다방을 오는 5월1일부터 읍-면 지역에선 금지하기로 했다. 시골 다방은「유흥업소」의 구실까지 해 주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유다. 다방이 유흥업소가 되었다는 풍속은 격 세의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고 다방을 없애기로 한 행정조치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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