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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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신문사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그 어느 때 없이 높은 것은 특기할 일이다.
중앙일보 자료조사실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독자들이 신문에서 가장 많이 읽는 고정란 가운데 사설이 수위 권에 올라있었다.
「해외토픽」이나 TV프로는 극히 일상적인 관심거리이고, 만화의 경우 대중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바로 그 다음 순위에 사설이 올라있다.
이것은 사설의 내용이 어떻다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분위기가 시시비비에 귀를 기울이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구나 그것은 70년대 말기 이른바 「유신」시대와는 아주 대조적인 현상이다. 「시시비비」란 원래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 순자의 책에 나오는 글귀다. 그는『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일러 「지」라 하고(위지지), 『그른 것을 옳고, 옳은 것을 그르다』(비시시비)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위지우)이라고 했다.
2천 몇 백년전의 얘기가 빛을 바래지 않고 오히려 이 시대와 함께 더 광채를 내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이 순리에 따라 굴러가면 발전하기 마련이고, 화평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순리란 옳고 그름을 가려 옳은 길을 간다는 뜻이다.
이런 순리가 막혀 버리면 마치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동맥경화 현상이 일어나 화를 부른다. 사회학자들은 그것을 정치적 무관심이라고도 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되면 세상이 조용해졌다고 판단을 할지 모르지만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정치무관심의 사회가 되면 국민들은 에피큐리언(쾌락주의자)이 되거나, 아니면 정치가 독보·독단에 빠져 국민과 단절되고 만다. 세상이 편하기는커녕 긴장을 불러 혼란을 불러들인다. 인류사회의 발전과 함께 신문의 자유와 책임이 줄곧 운위되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 신문사설이 우리 사회에서 폭넓게 읽혀지고 있다는 얘기는 「시시비비」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갑고 믿음직스러운 현상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국민들은 지금 정치무관심 속에 깊이 잠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비비에 귀를 기울이며 모처럼 활달하게 무언가 생산적인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만일 국민들이 탈 정치적(디폴리티컬)이거나 무정치적(어폴리디컬)이라면 그 사회는 퇴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사람들은 좀더 진취적인 사고를 하고 싶어하고, 공평한 판단에 따르려고 한다.
신문의 「시시비비」적 기능이 마땅히 사회적으로 격려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기능이 활발하게 작동됨으로써 사회 모든 계층의 불평과 불만도 흡수되고 극단론도 극복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까지 그런 논란과 분쟁을 통한 부안 해소의 역할이 미흡해 특히 정치문제의 논의는 양극으로 첨예화해 긴장과 불안을 불러 들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정치사는 정·반·합의 순리를 통한 전향적 발전보다는 그 반대방향으로 뒷걸음쳐왔다.
만일 사회부위기가 무슨 문제에서나 논쟁과 토론을 받아들일 만큼 쿠션을 갖고 있었다면 서로 사생결단을 하고 원수 짓는 긴장과 충돌과 파국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혜택은 어느 한쪽에만 들아 가는 것은 아니고 따스한 햇볕처럼 모든 국민이 고루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평탄하고 온유해 진다는 얘기다.
오늘「신문의 날」을 보내며 우리 사회도 이젠 정치적으로는 40년 경험을 낳은 성열과, 경제적으로는 2천 달러의 중진국 수준에서 좀 의연해져야겠다. 그럴수록 신문은 시시비비로 국민의 원망을 받아들이고, 정치는 그런 토대 위에서 순리를 존중해 운영하면 세상은 그렇게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신문의 날」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생의 소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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