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몰라서 손해보는게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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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래바람 속에 해가 진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있는 우리 해외 건설의 현장에도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저녁을 마친 근로자들이 TV를 보기 위해 모여든다.
기자가 근로 현장을 찾았던 날 저녁 프로는 『조선 왕조 5백년』. 『꽃반지』『퀴즈로 즐깁시다』등의 비디오 테이프도 있지만 역시 『조선 왕조5백년』이 인기다.
TV를 보며 잡담도 하고 간혹 한바탕 큰 웃음판도 벌어지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왠지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초탕띠기」 시절의 활기찬 맛이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모습들은 요즈음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 퍼져 있는 4백45개 해외 건설의 현장 어디에서나 거의 공통된 모습들이다.
70년대에 이어 80년대에도 중동 건설 현장은 여전히 우리 경제의 중요한 「현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현장의 모습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활기는 찾을 수 없어>
현장 주역들의 표현을 빌면 70년대 「선수금의 현장」이 80년대 들어 「페널티의 현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무엇이 이토록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을까.
쉽게 이야기되는 대로 유가 하락에 따른 중동 건설 경영 환경의 악화 때문일까.
물론 그 같은 유가 하락도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중동 산유국 전체를 평균해서 보면 80년대 초 20%에 이르던 선수금 지급 비율이 83∼85년간에는 5%로 떨어졌고, 기성금 지급 기간도 종전 2∼3개월 걸리던 것이 최근엔 3∼6개월로 길어졌다.
그러나 선수금 지급 비율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 새 공사를 딸 때 서로 합의하는 계약 조건상의 문제다. 선수금 지급 비율이 현저히 불리하다면 그 같은 공사는 안 하면 그만이다.
또 기성금 지급 기간이 비록 길어졌다지만 우리가 제대로 공사만 한다면 결국에는 받을 수 있는 돈이다.
중동 건설의 현장이 「페널티 현장」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 이유는 그 같은 경영 환경의 악화보다도 중동 건설 시장의 발주량 감소에서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일감이 줄어들면서 그 동안 쌓여온 「적자 현상」을 당장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선수금 현장」이 쉽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계속 굴러가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뜻에서 흔히들 해외 건설을 「자전거」에 비유하지만 이것은 적절한 비유라기보다는 차라리 뼈아픈 교훈이다.
해외 건설을 「자동차」로 끌어오지 못하고 「자전거」로 끌어온 것은 선수금의 시대에 뒷일을 생각 못하고 저질렀던 큰 실책이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동 건설이 부실의 현장으로 모습을 바꾸게 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중동 국가들의 사고 방식·상 관습·행정 제도 등을 우리가 너무 모른 채 뛰어들었고 이후에도 효율적으로 적응해온 업체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행주까지 일급으로>
「턴키 (Turnkey) 가 망 「키」라고, 요즈음 우리 업체들간에 통용되는 한숨 섞인 유행어가 바로 그 같은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다.
중동 국가들이 발주하는 턴키 베이스 공사의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 업체들이 서울에서의 땅 짚고 헤엄치기식 아파트 공사 경험만을 믿고 뛰어 들었다가 거의 모두 손해를 보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턴키 베이스 주택 공사란 우리 업체가 건물의 외형·내장은 물론 부엌의 식기·칼·도마·쓰레받기·휴지통·행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재 도구를 구매 해다 비치해 놓고 입주자는 말 그대로 열쇠 하나로 문만 따고 들어가 그대로 살기만 하면 되게끔 해야 하는 공사다.
이 같은 공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외국의 엔지니어링 회사들이 까다롭게 그려놓은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우리가 수백 수천장의 세부 설계 도면을 그려 일일이 발주처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기본 설계에 시공상 어려운 곳이 있다면 다시 일일이 설계 변경을 해 역시 승인을 받아내야 한다.
공사를 해나가며 예의 가재 도구 등을 가져다 놓을 때에도 칼·수도꼭지·전등갓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계 초일류급의 제품들을 골라 다시 일일이 발주처 승인을 받아내야 비로소 구매·운반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일일이 확인 받아야>
세부 설계를 공기에 맞춰 짧은 기간 내에 발주처의 마음에 들도록 완벽하게 그려낸다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일뿐더러, 이 같은 일을 해나가면서 도처에서 맞부딪치는 그들의 철저한 자국민 우선주의, 종교 관습, 엄격한 규율 등에 어긋나지 않도록 적응해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예컨대 설계 도면 승인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에 들어가던 우리 현장 직원이 잠깐의 실수로 「이까마」 (사우디아라비아말로 신분 증명서라는 뜻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는 모든 외국인은 항상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발행한 이까마를 지니고 있게끔 규정돼 있다)를 사무실에 두고 왔다가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 끌려갔다면 그 직원을 도면과 함께 다시 빼낼 때까지 공기는 그만큼 늦춰진다.
아무리 신분과 상황을 설명해 봐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규율은 규율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 여성들이 외출을 할 때 비록 얼굴은 가리지 않아도 되지만 검은 천을 둘러써야 하게 돼있는 것처럼, 또 운전 경험이 많은 미국 여성이라 하더라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절대로 운전을 못하게 돼 있는 것처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모든 외국인은 이까마를 지니고 다니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이까마를 지니지 않았던 직원을 빼내오려면 정식으로 영어와 아랍어로 된 문서를 작성해 책임자가 서명을 하고 제출을 해야만 하며, 문서를 가지고 담당자를 찾아가 순서를 기다리다가도 회교의 율법에 따라 기도 시간이 되면 업무는 중단된다.
또 마침내 차례가 되어 일을 보게끔 되었다 하더라도 마침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이 일이 있어 왔다면 그가 일을 먼저 볼 우선권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에서 일을 해 돈을 벌려면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기 이를데 없는 이 같은 규율과 관습·사고 방식 등에 따라야만 하게 돼 있다. 미국의 건설 회사든 한국의 건설 회사든 똑같은 것이다.

<준공 검사 절차 엄격>
마찬가지로 공사가 끝나고 엄격한 준공 검사를 거쳐 현장이 발주처 측에 최종 인도되었다 하더라도 공사 대금이 완전히 다 정산되기까지에는, 예컨대 현장에 투입되었던 근로자의 이동·출국 등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의해 파악이 끝나야만 한다. 또 하루라도 공기를 넘기면 공사 대금에서 10%의 페널티가 깎여 그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국고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다.
회교 국가에서 돼지고기와 술이 금기라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당연히 받아들였던 우리 건설 업체들이, 턴키 베이스 공사를 수주해선 수금을 받은 뒤에도 회교 국가의 관습과 율법·행정 절차 등에 따라 공기 안에 공사를 끝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데에 실로 부실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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