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교수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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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려 명종26년(1196년) 최충헌은 많은 조신을 죽이고 최씨무인정권의 길을 열었다. 그는 생전에 신종·희종·강종·고종등 4왕을 옹림하고 명종·희종등 2왕을 폐했다. 왕의 생살발폐치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러함에도 그는 끝내 왕이 되지는 않았다. 왜그랬을까.
김용택교수(전남대·한국사)는 『왕위에 오름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정권의 몰락 보다는 국왕의 권위를 이용, 정권을 안정시키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최씨 정권 내부에서도 국왕의 권위를 내세워 최씨를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다. (『한국학보』 제42집)
김교수에 따르면 최씨 정권이 국왕의 권위를 이용한 구체적인 예는 왕실과의 통혼, 몽고와의 관계등에서 잘 드러난다.
최씨 집권자들은 혼인을 통해 왕실과 밀착, 정적들의 도전은 곧 왕의 권위에 대한도전으로 인식시키려 했다.
최씨 정권은 또 몽고와의 대화책임자로 국왕을 내세웠다. 몽고와의 강화는 곧 그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고 말리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항몽으로 일관하는 한편 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책임을 국왕에게 돌림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꾀했다.
말하자면 최씨집권기의 국왕은 최씨 정권을 유지시키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김교수는 『이렇게 되자 최씨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고려왕조 자체를 부인하고 나섰으며 신라·고구려·백제의 부흥운동이 바로 그것』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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