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조선 말기의 석학 김정희에겐 호가 많았다. 1백여에 이른다는 관측도 있다.
「추사」는 그가 가장 자주 쓴 호였다. 그러나 「완당」이니, 「완장 노인」이니 하는 호도 흔히 썼다. 그때의 「완」은 그가 존경한 청의 학자 완원에서 따온 것이다.
「보담재」란 호도 있다. 그것 역시 청의 거유 옹방강의 호 담계와 보소재를 딴것이다.
또 하나의 호 담연재는 옹방강의 담과 완원의 호 연경재에서 따온 것이다.
25세 때 북경에서 추사가 만난 옹방강은 이미 78세의 학계 원로였다. 추사는 그의 품격과 학술에 존경을 그칠 수 없었으나 옹방강 역시 추사의 기백과 향학열, 그리고 경학에 대한 조예에 경탄했다.
옹방강이 추사를 「경술 문장이 해동 제일」이라하고, 「해동 제일의 통유」라고 절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추사의 학문과 서예는 어느 면에서 옹방강과 완원의 영향이었다.
그의 『실사구시설』이나 『완당 선생 문집』에 보이는 경학과 서예에 대한 논문은 완원의 저술에서 많이 따오고 있을 정도다.
특히 완원은 1백83종, 1천4백권, 5백 책에 이르는 그의 『황청 경해』를 만리 밖 조선 땅의 추사에게 기증한 바도 있다.
추사의 학문과 서예가 이미 당대에 국제적으로 성망을 높이고 있었다는 증기다.
그로써 추사는 약관 24세로 청에 갈 때 품은 포부를 이뤘던 것이다.
『탄식한 나머지 새로 생각나니/해외에 지기를 맺고 싶구나/서로 마음을 통할 사람이 있다면/가히 죽어도 한이 없으리라/중국의 서울엔 명사가 많다하니/스스로 부럽기 한이 없구나』라고 읊었던 회포도 풀렸음직하다.
그러나 「해동의 통유」요 서도의 절인인 추사도 시대의 곡절에 따라 두 번에 걸쳐 12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추사체라는 서법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왕희지 이래의 정통파를 형성한 구양순의 서풍을 이어받아 서법의 대성을 이룬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선인의 서체와 금우문을 변론하고 직접 금우문들을 고석했다.
함흥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를 판독, 고석한 것도 그였다.
지금 그는 위대한 서예가로만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경학과 사학은 물론 불교, 도교 등 광범한 학문의 숲속에 감춰져 있다.
그의 사상과 학문을 밝히는 알찬 연구도 아직 미흡하다. 일본인 등총린의 연구이래 진전이 없다는 호소도 있다.
다만 지금 그의 탄신 2백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 예산에선 기념관과 유적비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사상의 광휘를 밝히는 연구도 성했으면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