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트렁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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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언희(1953~ ), '트렁크'

이 가죽 트렁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지퍼를 열면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 온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

코를 찌르는, 이렇게

엽기적인



이 짐짝은 누구 겁니까. 감히 하느님께 보내려다, 누구에게 보냈는지 반송되었답니다. 이보다 더 추악하고 음란하고 잔혹한 그녀의 시.

너무 달콤해서 물러터진 저와 잔당들에게만 보냅니다. 그래서 몰래 이사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쓰레기통이 없다면… 모두가 나눠가진 이 짐짝. 하느님께 일러바치려다 그냥 주저앉고 맙니다.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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