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다음날 억류…9년만에 풀려나|유대계 소 인권운동가 시차란스키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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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베를린 외신 종합연합=본사특약】11일 9년만의 감방 생활 끝에 자유의 몸이 되어 서방세계로 석방된「시차란스키」는 이날 하오6시45분(한국시간)동독 포츠담시와 서베를린을 잇는 유서 깊은 글리니케 다리를 건너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온「리처드·버트」서독주재 미국대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은색 모피로 된 모자를 쓰고 나타난「시차란스키」는 글리니케 다리 중간 지점쯤 호송차량에서 내려 곧바로「버트」대사의 벤츠 승용차에 탐승, 템펠호프 미군기지로 향했다.
이번 스파이 교환이 이뤄진 베를린의 글리니케 다리는 동서간의 인적교환으로 이미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가장 유명한 스파이교환으로는 지난 62년 소련상공에서 격추된 미 고공유인정찰기 U-2기의 승무원「게리·파워즈」와 KGB의 거물간첩 「루돌프·아벨」의 교환.
이후 지난 85년6월 동구권에 억류돼 있던 25명의 서방인과 서방에 억류돼있던 4명의 동구 요원들의 교환 때까지 이 다리에서는 공식·비공식 인물교환이 잦았다.
이날 스파이교환의 최대 난점은「시차란스키」의 석방 방식이었다. 미국 측은「시차란스키」가 스파이가 아닌 반체제인사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석방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련은 스파이라고 주장, 일괄인도를 주장해 왔다. 결국「시차란스키」를 다른 스파이보다 1시간 먼저 다리를 건너게 함으로써 양쪽의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타결된 것. 「시차란스키」는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원에서 컴퓨터를 전공, 졸업과 함께 석유 및 가스산업관계 연구소에서 일해온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는 지난 73년 이스라엘 이주신청이 거부된 것을 계기로 이주금지 유대인 조직인 레푸세닉스에 가담했고, 76년에는 반체제조직인 헬싱키 인권그룹 창설 멤버로 나서는 등 반체제운동에 앞장서 왔다.
이때부터 뛰어난 유머감각과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각종 인권단체의 대서방기자회견을 도맡는 등 소련의「눈엣가시」가 되었다.
그는 77년3월 자신의 동료「사냐·리파프스키」로부터 미CIA첩자라고 매도된 후 78년7월부터 간첩혐의 및 반소 선동혐의로 13년의 징역 및 강제노역형을 선고받고 9년 동안 복역해왔다.
이날「시차란스키」의 부인「아비탈」씨는 남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서독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74년7월5일 모스크바에서「시차란스키」와 결혼식을 올린 바로 다음날 이스라엘로 떠나야했던「아비달」씨는 6개월 뒤에 남편을 이스라엘로 보내주겠다는 당시 소련당국의 약속과는 달리 무려 4천2백일동안을 기다린 끝에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게된 셈이다.
「아비탈」부인은 지난 73년 모스크바의 한 유대교회당 밖에서 그녀의 오빠「미하일」의 소개로「시차란스키」를 만나게 됐는데「시차란스키」가 74년6월「닉슨」미대통령의 방소기간 중 투옥, 「아비탈」의 이스라엘 이주허가비가 만료되기 이틀 전인 그해 7월3일 석방되자 바로 결혼식을 올렸었다.
한편「헤르조그」이스라엘 대통령은 이날「시차란스키」의 석방을 환영하면서 앞으로 더 많은 소련거주 유대인의 이주허가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국영라디오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은「시차란스키」를 환영하기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했다. 「페레스」수상이 참석, 직접 이스라엘 시민증도 수여한 이번 환영회는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공항이 생긴 이래 최대의 인파가 운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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