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새벽「뒤발리에」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르면서 아이티는 28년 독재의 종막을 고했다.
「프랑스와·뒤발리에」와 「장·클로드·뒤발리에」부자 2대 독재는 그간 아이티의 악몽이었다.
57년 정권을 잡은 아버지「뒤발리에」는 64년 종신대통령제를 채택했었다.
그후 당뇨병으로 사망하기까지 아버지 「뒤발리에」(파파 독) 는 아들에게 정권을 물리기 위해 기막힌 제도를 만들어냈다.
우선 71년1월 아이티 독립기념일에 「파파 독」 은 젊은 지도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래는 젊은이의 것이며 때가 오면 젊은이에게 정권을 넘겨줄 생각』 이라는 것이다.
그때 그는 「시저」 와 「아우구스투스」도 불과 19세에 로마제국의 통치권을 계승했다는 걸 인용했다.
그땐 아직 아들에게 정권을 인계한다는 언질이 없었다. 그러나 이틀 뒤 아이티군부는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우리는 생명을 바쳐 「클로드」군을 대통령 후계자로 받들 것』 을 맹세한 것이다.
바로 그날 「파파 독」은 긴급의회를 소집, 청소년의 공직담당 연령제한을 규정한 당시 헌법은 『과학기술시대인 20세기의 사상과 관념에 배치된다』고 결의하도록 했다.
이어 한 주일 후엔 또 한차례 긴급회의를 소집, 대통령 피선거권을 40세에서 20세로 낮췄다. 동시에 아들의 나이도 19세에서 21세로 고쳤다. 그 뒤에 한 것은 의회 앞 관제데모.
「클로드」를 다음 대통령에 지명할 것을 「민의」로 요구하는 절차다.
아버지 「뒤발리에」는 그 「민의에 못 이겨」 아들을 후계자로 제안했고, 그것은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그 국민투표에서 1표의 반대표가 나오지 않았던 것도 기록적이다.
여자와 자동차 드라이브로 세월을 보내던 「클로드」가 대통령이 된 것은 그 2주 후. 「베이비 독」의 탄생이었다.
그때 이후 아이티는 명목상만 민주공화국이었을 뿐 극악한 독재국이었다.
야당은 불법화되고 비밀경찰의 국민 탄압은 점점 고조됐다. 관료의 부패와 국민의 빈곤은 극에 달했다. 1인당국민 소득은3백80달러로 중남미에서도 가장 못사는 나라가 됐다.
지난해 11월의 민중 소요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국민의 폭발이었다.
아이티의 보호자격인 미국마저 경제원조 계획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뒤발리에」가 부인과 함께 드라이브 망명길에 오른 것은 학정의 보답으로는 오히려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