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협상」으로 문제 해결의 장 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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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통령의 국정 연설로 정국이 새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전두환 대통령이 「큰 정치」를 제창하고 개헌 논의 유보를 제의한 것은 확실히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정 연설이라는 가장 무게 있고 권위 있는 형식을 통해 제시·제의한 당면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만큼 정치인과 정당은 물론 국민들도 심사숙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국정 연설의 핵심은 86아시안게임·88평화적 정권교체·88올림픽이란 3대 국가적 과제의 성공적 성취를 위해 헌법 문제를 둘러싼 정치 대립은 그후로 연기하자는 것과, 그러한 3대 과제의 성공적 성취를 바탕으로 하여 그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2년여 후에 개헌 논의를 한다는 전제 아래 헌법 문제를 둘러싼 정치 대립을 일정 기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껏 정국이 호헌대 개헌으로 맞서 끝도 없는 소모전만 거듭해 왔고 그로 인해 정치에서 제대로 되는 일 한 가지를 보기 어려웠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 문제에 관한 여야 대립의 종식이 합의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문제의 성격이 앞으로 우리가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지며, 어떤 정치 질서 아래 살아갈 것인가 하는, 그 보다 더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거창한 과제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큰 정치」가 있어야 좋은 결과에 도달할 것도 틀림없다.
국정 연설이 나온 후 그 동안 정계를 죽 끓듯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검찰의 의원 기소 문제 같은 것도 어느덧 관심의 뒷전으로 밀리고, 「개헌 논의 유보」와 「89년 개헌 논의 방향」에 관해 과연 어떤 「큰 정치」가 나오느냐에 관심이 온통 집중되고 있다.
정부·여당으로서는 대통령의 이 새로운 소신과 제의를 어떻게 하든 실현시킬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국정 연설에서 이런 발언이 나오기까지에는 정부·여당 내부에서는 깊숙한 사전 논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추측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권의 다음 카드가 무엇일까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야권으로서도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인 이상 이런 중요한 얘기를 들으면 직감적으로 『뭔가 있구나』하고 느낄게 분명하다. 그리고, 개헌 논의 유보가 제의되고 89년에 가서 논의하자고 할 때면 유보를 가능케 하는 여건 조성 문제도 미리 생각했음직할테고 89년의 논의 방향도 얘기될 수 있음직 하다고 느낄게 분명하다. 실제 요즘 야당에서는 여권이 어떻게 나올지 주시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은 자제하는 기색이다. 야당 수뇌부 쪽에서 개헌 서명 운동의 기정 방침을 수정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했지만 그것이 곧 야당의 회답은 아닌 것 같다. 요컨대 야당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여야에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를 두고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대 협상」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개헌 논의를 어떻게 하면 유보할 수 있는가, 또는 소모적 개헌 논의를 어떻게 지양할 수 있는가, 평화적 정권교체의 안정적 성취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가에 대해 여야가 일대 협상을 함으로써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결론을 내고 안정적 정치 전개를 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큰 정치」의 요체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장애가 많고 이해 관계가 엇갈릴수록 큰 정치의 요청은 더 절실해진다. 여야가 다같이 큰 정치로 큰 협상을 함으로써 헌법 문제에 명쾌한 결론을 낼 수가 없을까.
큰 문제의 해결 방향이 일단 잡히면 나머지 문제들은 문제도 안 된다.
그래서 전 대통령이 강조한 「국력을 모으고 민족 자산을 늘려 가는」 큰 정치의 내용도 달성돼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당으로서는 야당이 앞으로 2년 몇 개월간 무조건 개헌 논의를 자제해 주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만무할 것이므로 개헌 논의 유보를 실현키 위해서는 「야당이 유보에 응할 만한 그 무엇」을 낼 필요가 있다. 과거 유신 정권은 개헌 논의 자체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로 대응했지만 그것은 이미 정치도 아니요 더더구나 큰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야당도 협상이 열린다면 우선 3대 과제의 성공적 성취를 위해 최대의 협력과 노력을 다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해야 할 것이다. 야당에도 3대 국가적 과제의 성공적 성취는 남의 일일 수 없다. 이를 위한 야당 나름의 복안을 내놓아야 한다.
여야가 이런 거시적 자세로, 큼직한 포석을 갖고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그 자체로 우리 정치의 커다란 진전이 될 수 있다.
지난 약 1년간 서로 접점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호헌이니 개헌이니 하고 다투어 온 무의미한 정치 대립이 이제 뭔가 진일보하여 구체성 있고 의미 있는 의견 교환 단계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한다. 게다가 「큰 정치」가 제창되고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좁쌀 정치」나 소탐대실형 정치는 더욱 배척받고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빈축을 사게 될 것도 분명해졌다.
이런 바탕과 이런 계기를 잘 활용하여 대 협상으로 문제 해결의 장을 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협상이 아니고서는 도대체 어떤 해결 방법이 있겠는가. 【송진혁 <본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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