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통령의 국정 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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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개헌 논의의 유보 제의>
전두환 대통령은 16일 새해 국정 연설을 통해 단임 평화적 정권교체의 소신을 거듭 역설했다. 우리는 그 동안 전 대통령으로부터 그와 같은 얘기를 수 없이 들어오면서 그래도 일말의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임기를 불과 2년여 남겨 놓고 전국민 앞에서 행한 시정 연설에서 또다시 평화적 정권교체의 신념을 「외곬 신앙」이라고까지 말한 전 대통령의 의지에 적이 안도하게 된다.
향후 2년을 생각하면 중첩한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우리는 두 차례의 국제적·역사적 스포츠 행사를 치러야 하고, 이왕이면 문화 국민의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면서 성공적으로 치렀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 성장을 통해 우리 국민경제의 가장 큰 과제가 되어 있는 외채를 갚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에 있다.
만일 경제발전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청사진대로 이룩된다면 그야말로 선진국으로의 진입은 한낱 환상이 아니다.
이런 일들은 또한 역설적으로 말하면 집권자에겐 권력에 집착하고 싶은 유혹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법대로 권좌에서 물러나겠다는 소신을 갖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까지 역대의 집권자들은 그보다 못한 유혹도 이겨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는 소박하게 생각하면 집권자가 때가 되면 순순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논란이 되고 있는 개헌 문제에서 야당이 주장하고 있는 대통령 직선제가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를 갖고 있음은 전 대통령도 인정하면서 직선제가 결코 나쁜 제도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직선제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단 한번도 이룩하지 못한 결과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개헌 논의는 89년에 가서 하는 것이 순서』라고 정국의 태풍의 눈이 되어 온 개헌 논의에 쐐기를 박은 셈이지만 앞으로 이에 대한 야당의 대응이 어떻게 나올지 매우 주목된다.
그 동안 신민당은 민추협 등 재야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1천만 서명 운동 등 장외 개헌 투쟁도 불사할 움직임으로 있다.
『대통령은 내 손으로 뽑아 보자』는 게 총선 민의라고 믿고 있는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관철한다는 방침을 계속 고수할 것이 분명하다. 야당의 집요한 요구뿐이 아니고 학생 문제·근로자 문제 등 복잡 다기하다.
야당이 이런 사회 불만 세력과 손을 잡고 극한적인 투쟁으로 나올 때 정부의 『법과 질서를 어기는 어떤 행위도 단호히 규제한다』는 강경 대응에 부닥쳐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휘말릴 가능성은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
그러한 통치 부재 상태야말로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우려하는 파국적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교체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지난날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은 결코 헌법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집권자의 권력 연장을 위한 아집에서 발단되어 숱한 부작용과 무리를 무릅쓰고 강행되어 온 것이다. 헌법이 흑색이냐, 백색이냐는 문제 밖이었다. 권력자의 아집과 권력자 주변 간신배들의 책동이 결국은 헌법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왜곡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군의 정치 개입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서구제국에서 군이 정치의 표면에 부상하지 못하는 까닭은 군이 정치적 욕구가 없어서라기보다 국민 전체의 의식구조가 그런 엄두도 당초부터 못 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38연의 장기 군사정권을 장악했던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경우를 보자. 민정에 불만을 품은 군의 두차례의 쿠데타 기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 원인은 어디 있는가.
스페인의 1인당 GNP는 5천달러에 이른다. 정치의 밑을 받쳐 주는 경제가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 군 내부의 의식 구조까지도 민주화되어 전반적인 분위기가 쿠데타 책동에 동조를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1989년엔 경제 성장이 이룩되어 1인당 국민소득이 3천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민소득 3천달러의 중진국에서는 생활 수준의 향상과 함께 국민의 의식도 높아지고 우리들의 형제들인 군의 의식도 높아져 군의 정치 개입이나 폭력에 의한 정변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정치란 상부 구조를 경제란 하부구조가 규정짓는다는 무슨 도식적 사고방식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 대통령이 89년을 개헌 논의의 시기로 잡은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비록 수평적인 것이 아니고 수직적이라 하더라도 평화적 정권교체가 88년 초에 이룩되고 그해 여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면 「세계 속의 한국」의 지위도 그만큼 격상되겠지만 정치의 안정은 경제도 한층 성장시켜 그때쯤엔 헌법을 비롯해서 어떤 정치 논의도 사회적 안정이 흔들리게 하지 않을 만한 기반을 조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는 전 대통령의 연설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전 대통령이 「큰 정치」를 강조한 대목에 각별히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말대로 국력을 모으고 민족 자산을 늘려 가는 「큰 정치」는 국민 모두의 여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큰 정치」는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고 소수의 의견도 수용하겠다는 아량을 함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큰 정치」가 그 동안 막혔던 야당과의 대화 재개에 돌파구 구실을 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헌법은 절대로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시대 상황과 사회 여건에 맞추어 바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 대통령은 그 시기를 88년 이후로 잡은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바 경제적으로 「안정 속의 성장」이 성공을 거두고 정치적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실현된 다음 극한적인 갈등과 마찰 없이 개헌 논의를 제기하고 또 더 좋은 헌법을 탄생시키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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