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춘추|이억순<본사논설 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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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전기대입이 몰고 온 입시열풍은 지나갔다.
눈치작전의 극치와 함께 신문을 장식한 헤드라인은 사범계학과의 미달사태다. 그 까닭이야 교원의 사회적 위를 비롯해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요컨대 취직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딴 계통의 공부를 하면 취직은 무난히 되는가. 물론 그렇지가않다.
수출부진·불황 등으로 고학력자들의 실업문제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입시전쟁은 꼭 지옥을 연상시킬 만큼 처절하기만 하다.
적성과 소질에 따라 소신있게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야한다는 충고는 극소수 고득점자 말고는 「신경을 돋우는」 공자말씀에 불과하다.
대부분수험생들에게는 아무대학, 아무 학과건 붙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절박하고도 어길 수 없는 지상명령이나 같다.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있다는 「사실증명」이 없이는 행세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직은 고사하고 혼사길도 막히는 판이니 어쩌랴다. 한마디로 「학력사회」의 왜곡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합리적인 사회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나름대로의 보람을 갖고 사람다운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일컫는다. 우리는 그런 모형으로 유럽제국을 꼽는다.
나라마다 약간씩은 다르지만 영국의 순경이 국회의원을 부러워하지 않고, 프랑스의 교사월급이 판·검사수준과 맞먹는다는 얘기를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니까 대학 아니면 죽는다는 따위 강박감과는 거리가 먼 여유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일본도 학력사회 라지만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형편이 낫다.
경제규모·소득이나 역사·전통의 차이는 따질 겨를이 없지만 그 일본에서 조차 학력사회타파 문제가 교육개혁의 첫번째 과제로 등장했다.
고도정보사회에서 「학력」 이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가려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오는 새 정보·새 지식을 흡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현재의
학교교육으로는 대응할 수 없을 게 아니냐. 다른 이유도 많지만 학력타파의 과제는 이런 인식에서 출발하고있다.
그래서 일본의 임시교육심의회는 학력주의 타파책으로 ①기업의 학교 지정제 폐지 ②고졸·대졸로 구분되는 고정적인 채용방법의 재검토 ③기업안에서의 능력주의 촉진등을 건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문부성과 노동성은 재계4단체의 장과 모임을 갖는가하면 국무회의에서 공무원채용에 공평을 기하도록 요구하는 등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눈가림이거나 형식적인게 아니냐는 빗발 같은 비판이 일고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형편은 어떤가. 간헐적으로 문제제기는 있고 학력간 임금격차를 줄이자는 문교장관의 기업체에 대한 협조공문이 있기는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아직도 체계적 연구가 착수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학력타파란 복합적이고 지난한 문제다.
문교부의 힘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와 기업이 협조한다고 간단히 풀릴 문제도 아니다. 국민의 의식·생활수준의 향상과 함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엄두도 못 낼 과제임을 누가 모를까.
그렇다고 무작정 세월에만 맡기면 입시철의 홍역은 둘째치고 사회적 낭비는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커질게 뻔하다.
「학력사회」 개인에 대한 평가가『무엇을 어느 정도 배우고 아는가』란 실력보다는 『언제 어디서 배웠는가』를 더 중시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가 개인의 가치나 능력은 물론 개성의 평가에 마저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학습·교육의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고 일단 사회에 나오면 학력이나 자격을 얻거나 자기능력개발을 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게 우리의 현실이다.
더우기 기업들이 우수한 인재확보를 위해 고학력자를 선호하는 경향은 하나의 관행이 되다시피 되고있다. 확실히 이런 관행은 여러사람 가운데 소수의 정예를 선발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고 기업의 성장·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우수한 인재 확보는 바로 기업이 사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의 이 같은 학력주의가 학교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입시전쟁을 가열시킨 요인의 하나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의 교육도 양 못지 않게 질도 따질 때가 되었다. 간판이나 따기 위해 적성과는 아무 관계없이 눈치보고 들어간 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아무리 많이 배출한들 이 사회를 위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학력사회의 시정은 사회체계자체의 개혁과 같은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우리도 교육개혁심의회를 구성, 전반적인 교육개혁에 착수한 이상 종합적인 연구대책팀의 구성만이라도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장기적으로 보면 평생교육사회를 건설하는 것만이 학력사회를 근본적으로 시정하는 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입시홍역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의 교육을 뒤틀리게 하는 요인은 학력편중의 사회풍조에서 비롯된다해서 과언은 아니다.
교육개혁심의회가 21세기를 향한 교육개혁을 목적으로 발족했다면 교육을 왜곡시키는 주범인 학력주의의 폐품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해서 그 처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교육
제도의 근본을 고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심의회의 존재의의에도 흠집이 생길 것은 뻔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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