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창간한 영국인 배세|"한국오기전 일본서 무역업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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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노일전쟁을 취재하러 한국에 왔다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일제와 싸웠던 영국인 배세(Ernest Thomas Bethell)의 출생·가계·한국에 오기전까지의 경력과 신문발행경위 등이 소상히 밝혀졌다. 정진석교수(한국외대·언론사)가 영국의 여러 기록보존소 자료와 일본·한국측 기록을 종합해 밝혀낸 사실은 이렇다(『신문연구』85년 겨울호「배세의 인물고」).
배세은 1872년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결혼하고 1909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의 서대문 밖에서 죽었다.
그는 극동상대의 무역상을 경영하는 「토머스·핸콕」과 전도사의 딸인「마서·제인·홀름」사이에서 다섯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살때인 1888년 일본으로 건너가 l6년간 고오베(신호)에 살면서 무역업을 했다. 1899년 동생들과 설립한 Bethell Brothers라는 무역상은 현재도 런던에서 영업 중이다.
그는 한때 사업에 성공, 큰돈을 벌었으나 일본인들의 방해로 모았던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다. 그는 고오베에서 스포츠와 사교클럽으로 가장 역사가 긴 KR&AC(Kobe Regatta & Athetic Club)의 사무국장과 운영위원을 맡기도 했다.
배세은 성격이 급했으나 스포츠를 좋아했고 음악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며 술과 담배를 즐겼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일본에서도 신문에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는 1904년 3월10일 영국 데일리크로니클의 특별통신원으로 서울에와 같은 신문 통신원이던 친일파 인물「토머스·코웬」과 신문창간을 준비했다.
그들은 처음엔 한국측 뿐 아니라 일본·러시아측으로부터 라도 경영자금을 지원 받을 것을 기대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한국을 옹호하고 일본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배세과「코웬」은 대한매일신보 창간호를 낸 후 곧 의견충돌로 갈라져 신문은 배세이 단독으로 운영하게 됐다. 마침 배세은 당시 일본측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사실을 비판해서 일본측의 불만을 샀다.
그는 여기서 신보의 논조와 경영문제에 확고한 태도를 갖게됐다.
한국의 실정으로서는 한일양측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신문이란 있을 수 없으며 신보는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배세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역할이 한국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자각했다. 1910년「한일합방」이 되기까지 대한매일신보는 高宗의 지원과 양기탁 등 민족진영인사들의 참여로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 됐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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