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옥금, 법 배워 이주민들 돕는 베트남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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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옥금씨는 양손을 똑같은 높이로 맞춰 들면서 “모두 동등하게 존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별 없는 사회’가 그의 가장 큰 바람이다. [사진 임현동 기자]

휴대전화의 진동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재한베트남공동체 대표이자 베트남통번역상담센터 대표를 맡고 있는 원옥금(41)씨는 한국어 “여보세요”와 베트남어 “알로”를 번갈아 쓰며 전화 받기에 바빴다. 억울한 일을 당한 베트남 노동자·이주여성들을 돕는 일이 그의 역할이다.

재한베트남공동체 대표 원옥금
베트남서 통역사 하다 한국 남편 만나
귀화 후 한국서 이주민에 번역 봉사
고용주와 협상 때 입과 귀 돼 주기도

원씨는 결혼이주여성이다. 베트남에서 영어 통역사로 일했던 원씨는 1997년 한국 건설회사의 파견직원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마침 그의 남편은 13세기 한반도에 귀화·정착한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 ‘화산 이씨’였다. 원씨는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친근했고, 양가 모두 결혼을 흔쾌히 허락했다”고 말했다.

신접 살림은 경기도 남양주에 차렸다. 그는 “당시만 해도 다문화가정이 별로 없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시어머니 친구들을 내 친구 삼아 지냈다”고 말했다. 한국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동네 문화센터에서 요리와 에어로빅 등을 배우며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갔다. 두 살 터울 남매도 낳았다. 여느 한국 주부들과 다를 바 없었던 그의 삶에 변화가 생긴 건 2004년 인터넷 카페 ‘한베가족모임’이 개설되면서다.

“결혼이주여성이 갑자기 늘어났을 때였죠. 부부 사이에 언어 소통이 안 되는 게 심각한 문제였어요. 처음엔 무료 번역 봉사를 하며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도와줬는데, 그 정도 도움으로 해결 안 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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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남편에게 부당 대우를 받다 이혼당한 뒤 억울하게 추방되는 사례가 특히 많았다. 원씨는 “ 한국의 법을 배워 제대로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2006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들어갔고, 졸업 후 구리이주민센터에서 봉사를 하며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도 눈을 떴다.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심지어 사장에게 폭행까지 당하는 노동자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대우를 받고도 3년 동안 세 번 넘게 사업장을 옮기면 불법체류가 되는 현행 제도 때문에 다른 일터로 쉽게 옮기지도 못하고요.”

그의 법 지식과 언어 능력은 억울한 처지에 놓인 베트남 노동자와 이주여성들에게 유용하게 쓰인다. 폭행당한 일로 진술서를 쓸 때, 산재를 당한 뒤 병원 진료를 받을 때, 사업주에게 열악한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할 때 등의 자리에 그는 함께 간다. 통역을 하면서 최대한 노동자·이주여성의 권리가 지켜지도록 조언도 한다. 고용주와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할 때도 그는 믿음직한 대리인이 돼 준다. “베트남 노동자 중 내 휴대전화 번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법하다.

원씨는 “한국 사람, 베트남 사람이 똑같이 존중하며 사이좋게 사는 날까지 억울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했다. 또 “한국 사회도 갑작스레 많은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라며 “하지만 아직도 다문화 사회에 대한 준비가 안 됐고, 오히려 반다문화 정서가 생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전했다.

글=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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