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4347>제83화 장경근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0년12윌3일 우리가 도오꾜의 하네다공항에 도착한 것이 1일 새벽 5시쯤이다. 몹시 피로했지만 기자들이 많이 나와 있어 또 한차례 회견을 해야했다. 마침 기자들 중에 합동통신의 이기자도 나와 있어 반가왔다.
기자들의 눈이 따르고 있어 일단 페어먼트 호텔에 들렀다가 은밀히 조그마한 여관으로 옮겼다. 김기철사장도 오늘에야 나를 찾아 왔다. 김사장은 나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지만 그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해 지금껏 나와 만나는걸 조심해 왔다. 김사장이 서울의 신문들을 갖다주어 보았다.
신문에 난 집과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만순이 슬피 운다. 최하영·문봉제씨등이 나의 탈출때문에 병보석이 취소되고 운전사 황세환군과 병원에서 시중들던 정영례양이 범인 은닉등 혐의로 동대문 경찰서에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보니 마음이 무겁다. 나의 주치의 강태웅씨도 월요일 오전 11시 내가 병실에 없는걸 확인하고도 남산동 집에 다니러 갔다는 정양의 말을 믿고 있다가 하오 4시 다시 병실에 들렀다가 그제서야 상부에 연락했다는 이유로 입건할지도 모른다는 보도를 읽고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60년12윌21일 어제 이사를 했다. 시모다이다(하대전정) 에 있는 독채집을 보증금 5만엔, 월세·1만6천엔으로 세들었다. 김사장 조카 김창호군이 자동차로 만순을 데리고 나가 식기등 필요한 살림도구를 샀다. 숙소를 이리저리 옮기다 정착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나의 거처가 잘 감추어져 왔기 때문에 경시청 공안부의 보호도 오늘 저녁부터 안하기로 되었다. 줄곧 함께 지내던 순경도 돌아가고 나와 만순 단둘이 되니 자유스런 느낌 속에서도 또한 허전함을 감출수 없다.
저녁엔 김사장이 국내 신문들을 갖고 찾아와 주었다. 나는 김사장이 보내주는 국내 신문을 읽고 참고되는 것은 스크랩하는 것이 즐거움이다.
신문을 보니 밀항선의 선주나 선장등은 내가 누구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불기소되었다. 그러나 황세환군과 정영례양은 12월2일부로 구속기소되었다니 가슴이 아프다.
12월17일자 C일보 1면 칼럼에 엉뚱한 보도가 있다. 나에 관해 쓰면서 『조국을 배반함으로써 일본이 그것을 이용해 줄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여비가 불충분하여 일본인의 개인적인 원조를 빈다고 구걸했다…자기는 일본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한적이 없다고 치사막심한변명까지 늘어놓았다…』라고 쓰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 그 신문사의 기자를 만난 일도 없고 후꾸오까 공항과 하네다 공항에서 두차례 일본기자들과 회견한 내용은 이곳 신문들에 보도되었지만 어느 신문에도 이런 내용의 나의 말은 없다. 이건 터무니 없는 창작이다.
언론의 자유라지만 이런 창작까지해 명예를 훼손할수 있는가. 민주주의의 선진국인 영·미등 유럽제국에서는 어릴 적부터 『너는 너의 팔을 마음대로 휘두를 자유는 갖고 있으나 남의 코빵을 때릴 자유는 없다』는 자유의 한계를 가르치고 미국의 「대니얼·웹스터」는 『자유는 건전한 제한에 비례하여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와 관련하여 나에 관한 모함들이 연상된다. 민주국가의 주인공으로서 갖춰야할 자질중에 중요한 것은 강한 자에 대하여 용감하고 약한 자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인데, 역경에 처하여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동정과 변호의 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박해의 채찍을 가하는 잔인을 감행하는 것은 민족성의 향상을 위해서도 슬픈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