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경희, 나홀로 사는 여성 ‘안전 울타리’ 만들어…심혜정, 말 못하고 묻어둔 여자의 애환 영화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유경희 그리다협동조합 이사장


귀가·병원길 동행, 원룸 계약법 조언 등
생활밀착형 정보 제공 싱글족 자립 도와

기사 이미지

유경희 그리다협동조합 이사장

유경희(60) ‘그리다협동조합’ 이사장은 여성운동 1세대다. 1992년 여성민우회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지난 25년간 ‘여성들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여성운동에 투신해왔다. 호주제 폐지와 성매매방지법 등 굵직한 여성운동 이슈부터 생리대 부가가치세 폐지와 (남녀)평등명절만들기 운동 등 생활 속 이슈들까지 유 이사장의 손을 거쳤다. 그와 함께 88년 남녀고용평등법을 시작으로 94년 성폭력특별법, 97년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등 여성 관련 법·제도 또한 더 촘촘해졌다. 하지만 유 이사장은 “법과 제도가 미치지 않는 일상적 영역에서의 성차별과 여성인권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고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 대표가 최근 1인 여성가구 문제 등 ‘생활밀착형 여성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다.

“여성운동은 결국 여성들이 생활에서 느끼는 부당함과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희롱과 임금차별, 육아휴직 같은 사회적 문제는 물론 귀갓길 안전 같은 일상생활 속 안전권 문제도 여성운동의 대상입니다.”

유 이사장은 2013년 ‘여성들의 경제·심리적 자립’을 목표로 그리다협동조합을 꾸렸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통해 일상 속 남녀 불평등을 해소하고, 여성들의 역량 강화를 통해 경제적 자립까지 지원하자는 취지였다. 특히 혼자 사는 여성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울타리를 제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생활밀착형 커뮤니티를 목표로 했다. 실제 120여 명의 조합원 중 70% 이상이 여성 1인가구다.

기사 이미지

그리다협동조합 설립과 함께 유 이사장은 서울 마포구에 카페 겸 지역 커뮤니티인 ‘어슬렁정거장’을 열었다. 동교동의 골목길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어슬렁정거장은 누구든 편히 와서 커피를 마시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자, 여성들을 위한 세미나와 상담, 소모임을 기획해 여성 1인가구들의 아지트가 됐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교육은 대부분 재능기부 형태다. 조합원 스스로가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커리큘럼을 기획해 주말엔 요가와 뜨개질, 요리까지 다양한 수업이 이뤄진다. 혼자 사는 여성들이 모여 취미와 관심사를 공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울타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어슬렁정거장은 간병, 귀갓길 안전 등 혼자 사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함을 해소하는 역할도 한다. 유 이사장은 “전체 가구 중 20% 이상이 1인가구고, 특히 마포구의 경우 1인 여성가구 비율이 전국에서 셋째로 높다”며 “혼자 사는 여성들이 불안함이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면서 효율적인 여성운동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어슬렁정거장 한편에 놓여 있는 공용 일기장은 조합이 추구하는 ‘따로 또 같이’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효율적인 원룸 계약방법’ 등 1인 여성가구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조언부터 싱글족의 어려움 등 모든 일상의 이야기들이 공용 일기장의 소재다. 유 이사장은 “어슬렁정거장을 방문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1인가구지만, 다 함께 생일파티를 하고 아플 때 병원에 같이 가는 등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며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신경 써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심혜정 독립영화 감독


소소하지만 큰 울림, 워킹맘 등 위로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 될 수 있어”

기사 이미지

심혜정 독립영화 감독

3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심혜정(49) 감독은 여성주의 영화 감독이다. 유경희 이사장이 여성운동 1세대라면, 그는 두 아이를 낳고 영화감독이 되면서 여성의 삶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늦깎이 감독이다. 전업주부이던 2005년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다녔고, 대학원을 거치며 점차 실험영상, 단편영화로 자신의 분야를 확장해 갔다.

그의 영상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모티브로 한 것들이다. 30분 길이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아라비아인과 낙타’(2013)에는 심 감독의 아버지, 뇌출혈로 쓰러진 지 11년 된 어머니, 간병인인 중국동포 아주머니와 심 감독이 등장한다. 활동적으로 집안을 좌지우지하는 간병인과 간병인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아픈 부모님,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보면서 스스로 주인 아닌 손님이 된 것 같다고 느끼는 딸의 마음을 담았다. 심 감독은 “중국동포가 집안 돌봄 노동의 주체가 되면서 원주인(딸)과 묘하게 긴장관계를 갖고, 주객이 전도된다”며 “이주노동자를 사회적 약자, 구조의 희생자로 보는 기존의 영화와 다른 시선으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심 감독의 이 영화는 동년배 여성뿐 아니라 아이를 중국동포 보모에게 맡기고 출근하는 젊은 여성들에게도 큰 위로가 됐다. 이주노동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삶을 유지해 나가기 어려운 여성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얘기해주는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사 이미지

혼자라면 작업을 포기할 뻔했던 동료 여성감독들을 독려하며 협업한 것도 그가 주력한 일 중 하나다. 그 역시 처음엔 어린 자녀들을 두고 나오며 죄책감도 들었고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주부의 예술은 일이 아닌 취미로 보는 시선과 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때 그가 택한 것이 여성 동료들과의 협업이었다. 심 감독은 “아줌마 감독들은 돈·체력·시간 등 모든 것이 장벽으로 느껴져 지속적으로 영화를 찍기가 쉽지 않고 배급은 더 어렵다”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몇몇 대학 동기와 인사동의 한 옥상 베란다를 빌려 실험영상 상영, 단편영화 상영 등 원하는 것은 모두 해볼 수 있게 장을 열어주는 ‘옥상 영상 프로젝트’를 4년간 진행했다. 자신의 영화에는 동료 감독 김도영씨가 주연 배우로 출연하고, 또 김씨 영화에는 심 감독이 출연하며 품앗이 작업도 했다.

심 감독은 “지난해 열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감독 작품이 절반을 넘었지만 제작 지원금이나 배급 현실은 아직도 너무 열악하다”며 “더 많은 여성이 예술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는 데 뛰어들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저는 예술이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된다고 믿습니다. 현실에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나쳤던 것들, 강고하게 배치돼 있던 것들이 흔들릴 수 있도록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채윤경·정진우 기자 pcha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