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소법 개정의 방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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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신속한 재판」을 민사재판의 요체로 꼽는 사람이 많다. 그 민사소송을 제기해 판결을 받을 때까지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됨으로써 전작 판결문이 쓸모 없는 휴지 조각으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속한 재판 못지 않게 중시되는 것은 공정한 재판이다. 그 재판이 공정성을 잃고서는 아무리 빠른 재판도 재판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 있는 사람만 소송을 낼 수 있고 「돈이 재판 이긴다」는 풍조가 있고서는 아무리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도 국민에게 법익을 골고루 향유케 하는 재판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민사재판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 충족요건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민사소송 절차나 그 환경을 보면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못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민사소송의 절차법인 민소법이나마 크게 손질해 문제점을 해결해야한다는 국민적 요청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민사소송을 내놓고 판결을 받기까지 빨라야 몇 개월이 걸리고 늦으면 몇 년간 질질 끌어 지칠 대로 지치고 만다. 심신의 피로는 물론이고 경제적 손실도 적지 않아 「송사 3년에 망하지 않는 사람 없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그래도 이 경우는 소송비용이라도 있는 사람의 처지이고 그나마도 없는 사람은 소송에 드는 엄청난 액수의 인지대나 변호사 선임료가 없어 눈을 뻔히 뜨고도 소송 한번 내지 못하고 피해보상을 못 받는 사람들도 흔하다.
법원의 사정도 딱하다. 법관 부족으로 판걸을 내려야 할 각종 소송사건이 법관 1인당 1백 건이 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신속한 재판도, 공정한 재판도 기대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증거를 면밀히 조사하고 증인을 불러 진실을 파악해야하는데 걸핏하면 증인이 나타나지 않아 재판이 연기되고 목적하는 진실 추구도 어렵게 된다.
정부는 이 같은 문제 해소 방안의 하나로 현행 민소법 개정시안을 마련해 각계의 의견을 들어 국회에 내기로 했다. 60년 4월 현행법이 제정된 이래 25년만의 대수술인 만큼 개정시안의 내용도 눈에 뜨이는 게 많다.
소송법 선진화에 첫손을 꼽는 변호인 강제주의라든지, 법관의 직권주의, 불 출석 증인에 대한 벌금 또는 구류처분, 판결문 간소화 등이 그것이다.
75년 독일 개혁민사소송법을 본뜬 법관의 석명권 조항은 소송 당사자 중 어느 일방이 법률지식을 몰라 당연히 내세워야할 자기 주장을 못 펴고 있을 때 법관이 조언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관이 재판에 개입한다는 오해의 소지도 있고, 변호사들의 설 땅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좀더 연구되어야 할 조항이다. 불 출석 증인에 대한 벌금 또는 구류처분도 일본법에서 도입됐다고 하나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아무리 신속재판이 절실히 요구되고 번번이 출석하지 않는 증인이 있더라도 행정 벌 아닌 형사 벌까지 내려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다. 자칫하면 전과자가 대량으로 속출하기 쉽고 행정 벌로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결문 간소화도 그러하다. 판결문에 자기의 주장이 무엇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부당한가가 설명되어 있어야 할텐데 판결 결과만 있고 판결 이유가 없다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이처럼 이번 개정시안은 시안 자체가 안고 있는 논란의 대상도 많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절차법 개정만으로는 공정한 재판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이다. 법관의 정원도 크게 늘리고 국선 변호인의 처우도 대폭 개선시켜야 할 것이다. 국선 변호인의 보수가 현재처럼 몇 만원에 불과하다면 성의 있는 변호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 소송비용을 낮춰 주는 방안도 강구되어야 한다. 엄청난 액수의 인지대를 물어야하는 현행 소송 체제에서는 누구나 법익을 고르게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송법 개정과 병행해 사법행정차원에서의 수정·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행 민사 소송 비용에 관한 법률도 손질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강제 집행 법을 개정해 판결문이 실효 없는 휴지조각이 안 되고 집행력이 있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실효성을 유지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송사의 진정한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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