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숙<숙명여대 문과대학장>남의 가족 경칭은 상대위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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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번 북적 대표단이 서울에 왔을 때 그쪽 기자가 민속촌에서 어느 노인네를 보고 『늙은이는 자식을 몇이나 두었소?』하고 물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은 「분단 40년의 이질감의 충격」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언어감각의 이질감은 요즈음 남북한뿐만이 아닌것같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동고동락하고 살고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이와비슷한 경우를 당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TV의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지난 어버이날, 어느 노인 한분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아나운서인지 리포터인지 질문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할아버지! 자식들을 다 키워 놓으시고 이렇게 놀러 다니시니 좋으시죠?』
비슷한 경우로 새벽에 조깅 나온 노인을 붙잡고 묻는 말.
『왜, 손주녀석을 좀 깨워서 데리고 나으시지 혼자 오셨어요?』
앞의 두경우는 몰라서 저지르는 결례다. 자식들·손주녀석들, 도시 남의 자손들을 욕이 아닌 다음에야 대화에서 이렇게 부를 수는없다. 더우기 할아버지라고 깍듯이 공대를 바치는 터에 이건 정말말이 안된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되느냐? 어려울 건없다. 앞서 『아빠』 『그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상대방을 위주로 생각하면 틀림없다.
『자녀분들을 다 키워놓으시고』 『손주님들을 데리고 나오시지…』
이게 정상이다. 또 이런 호칭은 가족 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그 어른 자체가 객체화되는 대화다. 예컨대 어느집 며느리가 누군가와 시부모의 얘기를 한다고 치자.
『우리 어머님(께서는)은 당신 아드님만 아시지 며느님은 모르셔요』
여기서 『아드님』 『며느님』은 바로 자기네들 부부를 가리킨다. 그런데도 『님』을 붙인 것은 시모에 대한 경대다.
다음은 어느 여가수의 마이크 중계(무슨 명절이었던듯), 귀성객과의 인터뷰다.
『아저씨 선물을 많이 사셨는데 누굴 주실 거예요?』
『우리 마누라하고 애들것 이예요.』
『아저씨 마누라하고 애들이 어디 살고 있는데요?』
이쯤 되면 무슨말을 해야할까? 이경우 무의식중에 나온,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슨 반사』가 아님은 이질문을 한 여가수의 여유있고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서 엿볼수있다.
우리는 과도기란 말을 써 온지 오래되었지만, 언어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런 세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세대는 아주 어떻게 변모해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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