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장기집권 포석|크렘린 지도부 개편으로 친정 강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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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로마노프」축출과「그로미코」국가원수 추대 뒤의 소련 권력구조를 보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8년 전의 트로이카 체제가 되돌아온 모습이다. 당 서기장은「고르바초프」가,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은「그로미코」, 그리고 당 중앙위의장(수상)은「티호노프」(80)가 각각 나누어 맡게 된 것이다.
「고르바초프」가「브레즈네프」나「안드로포프」「체르넨코」등의 전임자들처럼 당과 의회·정부의 3권을 독점하거나 경직하지 않은 것은 예상 밖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난 3월 집권 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져온 과정을 보노라면 이번의 개편 또한 친정강화 장기집권을 향한 과도기적 포석으로 풀이할 수 있다.
크렘린 원로세력의 대표격인「그로미코」가 직업관료로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아 최고의결기관의 책임자인 국가원수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실권보다는 외국사절 접견 등의 공식행사에나 참석하는 의전적인 직책(Ceremonial Post)에 불과하다.「안드로포프」사망 후「고르바초프」대신「체르넨고」를 후계자로 옹림하는데 주역을 한 것으로 알려진「그리신」(70)이나「티호노프」등「그로미코」와 함께 정치국을 움직여온 인물들도「고르바초프」등장 직후부터 이미 사임설이 나돌고 있는 터여서 크렘린은 이제 초대에서 50대로 20년이나 젊어진 지도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초기인 지난4월 13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전 서기장 2명과 「우스티노프」전 국방상의 사망으로 빚어진 공백을 도두 50대 중반 또는 60대 초반의 신선한 인물들로 충원했고, 로마노프」를 축출한 자리에도 금년 57세의「때묻지 않은 사람」을 일약 정치국원 겸 외상으로 등용했다. <정치국원 명단 참조>
「그로미코」가 국가원수로 추대된 배경에는「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충복들을 권력의 핵심부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노장파 등 견제세력의 반발을 완화시키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한 지방공화국의 농업정책 담당자였던「셰바르나제」를 경험이 적은 분야인 외교무대에 내세움으로써「그로미코」가 비록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그의 반세기에 가까운 테크너크래트로서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한 뒤 자연스럽게 물러나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소련외교가「그로미코」의 손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는 당분간 큰 방향전환은 없을 것으로 서방에서는 관측하고 있다. 한 서방 외교관은「셰바르나제」의 외상 임용을 두고『국제사회에서 소련이 나쁜 인상을 받는 경우가 잦다는 사실을「고르바초프」가 깨닫고 웃을 줄 알고 여론을 의식할 줄 아는 인물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해 그가「고르바초프」처럼 현대감각이 있고 유연한 태도를 가져 전통적인 러시아 곰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시사했다.
「그로미코」가 미국과 서구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을 벌여온데 비해「셰바르나제」는 최근 아프리카 등 제3세계를 무대로 한 외교분야에 간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 외교의 기본노선에 변화가 없으리라는 예상은 2일 소 연방 최고회의에서 행해진 「고르바초프」의 연설에서도 잘 뒷받침되고 있다.
그는 강화된 조직의 총력을 기울여 경제개혁에 박차를 강조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을 뿐 대외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집권 3개월만에 확고한 안정세력을 구축하여 획기적인 소련의 변신을 이끌어 나갈 출발점에 와 있는 것이다. <홍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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