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수련의 비밀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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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채호기(1957~) '수련의 비밀1' 부분

종이 위에'수련'이란 글자를 쓰자마자
종이는 연못이 되어 출렁이고
자음과 모음은 꽃잎과 꽃술이 되어 피어난다.

만년필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잉크는
종이에 적셔지며 선들로 뻗어 나가거나
둥글게 뭉쳐져 덩어리를 이룬다.
물 위에 떠 있는 짙푸른 잉크-잎들.

연못 가장자리
녹색 쟁반 위에 흰 수련
과일 같은 하얀 피부가 물 위에 씌어진다.
햇빛의 뾰족한 끝에서 공기가 흘러나오면
투명한 수면 위에 수련이 기록된다.

물 위에 배처럼 정박해 있는 꽃받침
위에 그녀가 떠 있다.



'수련'은 시인의 몸이요, 시인의 시다. 시인과 시가 한 몸이 되어 백지 위에 수련으로 피었다.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컴퓨터를 치우고, 몸속을 피처럼 흐르는 푸른 잉크로 썼을 것이다. 푸른 잉크, 녹색 쟁반, 흰 수련, 하얀 피부…. 싱그러운 색채 이미지와 햇빛의 뾰족한 끝이 눈부시다. 비로소 물 위에 뜬 그녀는 알몸, 언어, 시, 시인이며 심청이며, 부처의 꽃이다.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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