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시청석에서|「없는 것」을 찾는 젊은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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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참 묘한 우리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에 가보면 갖출것은 다 갖추고 사는 그 푸짐한 살림속을 보고 없는 것이 없다고 그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흥부가 놀부집에 자보면서 하는말처럼.
혹은 해마다 보릿고개의 「춘궁기」를 경험해야 했던 빈한한 어버이 세대가 「보릿고개」 네, 「춘궁기」네 하는말도 모르는 아니, 도대체 밥 귀한 줄을 모르는 자식들의 세대를 보면 참 요즈음 세상은 없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박타기」이후 벼락부자가 된 흥부가 그의 자식 손주들의 흥청거리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하게될 말처럼.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사는 것에 대한 부러움의 표백이요, 또는 스스로 그러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음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만족의 표현이기도 하다.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결국「있다」, 갖추고 「있다」하는 긍정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못 가진 사람의 입장, 없어 본 사람의 입장에서 있는 사람, 갖게 된 사람의 경우를 평가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 다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아무런 부러움이나 만족감도 주지 않는 무의미한 말, 공소한 말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아본 흥부에겐 만금의 무게를 갖는 「없는 놈이 없다」는 말도 흥부의 손주 새끼들에겐 아무런 감동도 줄수 없는 넋두리처럼 들리게 된다.
그런 경우 이 말은 비로소 그의 부정적인 뜻이 드러날수도 있다. 「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뜻이, 만족감이 「없다」, 감동이 「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뜻이.
그러고 보면 사탕이란 참 기묘한 짐승이어서 「있는 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한 존재, 그래서 「없는 것」이 있어야만 되는 존재라고 할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의식은 어느 시인이 말한 대로 「있는 것」, 「현재」에 사는 경우란 거의 없고, 언제나 「없는 것」, 아직 없는 「미래」나, 이미 없는 「과거」속에서 살고있다.
사람이 정말 「현재」를 깨닫고 현재의 순간을 의식하는 경우란 다쳐서 몸의 통증을 느낄 때나 향락의 쾌감을 맛 볼때 정도요,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은 「미래」를 꿈꾸거나 「과거」를 회상하면서 산다.
더욱이 묘한 것은 사람에게 있어 삶의 힘을 대주고 있는 것이 「현재」의 통증이나 쾌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미래」의 꿈이, 또는 「과거」의 추억이 사람에게 삶의 힘을 대준다.
바꿔 말하면 「있는 것」이 사람에게 활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사람에게 활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른바 「헝그리 스피리트」(빈곤의식)같은 것이 성취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만일 「없는 것」이 이처럼 적극적인 긍정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러한「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부정적인 현상이요, 우려할 만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세상에는 없는 것이 없다고 하는 말도 단순히 대견스럽게만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해야 될것이다.
다행이건, 불행이건 역사란 원래 배은망덕한 것이다. 어버이 세대가 피땀흘러 경제개발을 이룩해 놓았다고 해서 그의 자식 세대들이 언제까지나 『물라보게 좋아졌네!』하고 찬양하면서 어버이 세대의 은공에 감지덕지하기를 기대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새로운 세대는 기성세대의 성취를 당연한 출발의 전제로 깔고 언제나 그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있는것 ,지금 주어져 있는 ,갖춰져 있는것에 감사해 한다거나 하물며 감격해하는 젊은이란 없다.
그들은 이미 있는 것은 외면하고 아직 없는 것을 찾고 있다. 야속하고 괘씸해도 그것이 현실이다. 역사의 배은망덕이란 말이 그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젊은이들의 세대가 기성세대의 이미 이룩한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아직없는것을 찾는다는것, 말하자면 「새로운 빈곤」을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곧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볼수도 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오늘의 젊은이들이 어버이가 벌어 놓은 부의 축적 위에 안주하면서 향락산업의 단골로서 그의 청춘을 탕진한다면 그걸 바람직스런, 「비문제적」인,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효성스런 젊은이라고 할수 있을 것인가.
6월의 대학캠퍼스에는 어수선한 한 학기를 서서히 마무리지으면서 푸르른 여름방학의 설계가 여기저기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올해엔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것이 학생들의 자발적인 농촌활동을 위한 캠페인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학생들의 농촌활동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다만 무언지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는 바람이 바뀌고 있다고 하는 느낌이다. 서울에서 시골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있는 쪽에서 없는 쪽으로 바람이 바뀌고 있다는 실감이다.
『4·19세대, 또는 60년대의 대학생선배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뛰었으나 우리들 80년대의 대학생들은「저 낮은 곳을 향하여」 일하려는 것이 다르다』고 나에게 설명해 준 어느 여학생의 말이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역시 기성세대의 자기만족에서 나온 넋두리요, 젊은이의 세대엔 「없는 것」이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새로운 「없는 것」이 그들의 삶에 힘을 주고 역사의 발전에 활력을 준다면 그들의 그러한「빈곤 의식」을 어찌 부정적으로만 보아야한다는 말인가.
다만 「없는 것이 있다」고 느끼는 오늘의 젊은이들을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나에겐 한가지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6·25이전에 이 나라의 적지않은 이른바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아직 「없는 것」을 「이곳」아닌 「다른곳」에서 「당장」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해서 산을 넘어가서 불행을 당한 그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다른 곳」에도 없다. 없는 것은 「다른 시간」에, 곧 젊은이들의 「미래」에 「이곳」에서 이룩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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