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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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느 작가의 『망향』이라는 단편이 있었다. 3대째 살던 고향집을 등지고 월남한 한 노인이 고향을 못잊어 전국을 헤맨끝에 충주 근처 시골에다 집을 짓는다. 물론 두고온 고향집과 꼭 닮은 짐이다.
산세도 그렇고, 집앞 개울의 징검다리며,물이 핀 웅덩이며, 심지어 기울어진 외양간의 기둥까지 옛집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듯한 모습이었다.
어느날 노인은 고향친구들을 불러다 망향의 회포를 푼다. 그후 며칠만에 그 노인은 집앞 웅덩이에 빠져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그것은 향수라는 표현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집념이라고 해야할 세찬 그리움, 아니 살을 저미는 아픔을 자아내는 호곡이라고 할까-, 그 자신이 월남작가인 선우휘는 이렇게 자문하고 있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있다. 매캐한 도심이 고향인 사람도 있고, 아파트대단지가 고향인 아이들도 있는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고향의 이미지는 「옛이야기를 지줄대는 실개건이 흐르고/얼룩배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읕 우는 곳…」(정지용의 『고향』 ) 이거나, 「목화꽃이 아름답고/조밤이 맛있는…」 (노천명의 『고향』 ) 그런 풍물이 더 어울린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향수라고 한다. 영어로는 노스탤지어(nostalgia), 희랍어의 nostos(되돌아감)와 algos(아픔) 에서 따온 라틴어다. 「회귀의 아픔」이란 뜻이다.
그 「아픔」은 우리의 경우 고향이 남쪽에 있는 사람보다 북쪽에 두고 온 실향민일수록 더 절실하고 애틋하다.
근년에 경향 각지에 조성된 「망향의 동산」이 7O여굿이나 되고 그것도 대부분 한치라도 더 고향땅 가까운 곳에 묻히려고 휴전선 근처가 많다고 한다.
그 「망향의 동산」에 새겨진 비명들을 읽으면 눈시울이 저절로 뜨거워진다.
「오늘도 구름은 날아서 북으로 가고,강물은 흘러서 남으로 오네. 아이야 먼붓날 누가 묻거든 고향이, 그리워 한탄강나루에서 흐느끼며 가더라일러라.」(연천의 정주동산)
12년만에 재개된 남북 적십자회담에서는 오는 8월15일 광복절을 전후하여 이산가족의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키로 했다. 분단 40년만에 정말 이산가족들의 재회가 실현될 모양인가.
그러나 40년을 기다려 온 일이니 조급하게 들떠서는 안될 것이다. 기대가 큰만큼 실망도 컸던 경험을 우리는 그동안 많이 겪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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