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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책] 한길사 '우상과 이성'(197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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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한길사 김언호(59.사진)사장의 머리 속에는 장래 직업으로서의 기자와 책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1975년에 자유언론 파동으로 동아일보를 떠나면서 기자 경력을 마감했으니 남은 건 책 뿐이었다.

해직 1년 후인 76년 12월, 그는 무조건 출판사를 등록했다. 밑천은 고향(경남 밀양)의 어머니가 "유학까지 보냈더니 밥벌이도 못하고…"라고 꾸짖으며 내놓은 30만원이 전부였다.

77년 10월, '오늘의 사상 신서'라는 시리즈로 송건호의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와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고은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가 나왔다.

당대의 논객 3명의 책을 한꺼번에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출판계의 빅 뉴스였다. 이 중에서 김사장은 '우상과 이성'을 첫책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시련이 따랐던 만큼 성취감 또한 컷으니 애정이 더 많으리라.

'우상과 이성'은 발간 1주일 만에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글 중에서 '다나까 망언에 생각한다''모택동의 교육사상'중 일부 내용을 검찰이 문제 삼아 저자 이씨를 구속했던 것이다.

'다나까…'에서 문제가 된 대목은 '북한 대표가 처음으로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우리 말로 했는데, 긴 눈으로 보면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떠나서 같은 민족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부분. 마치 딴 세상 이야기인 것 같다.

김사장은 다른 매체에 발표한 이씨의 글을 모으면서 딱 한편만 새로 써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것이 '현대인의 충효사상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불효자의 변'이었다. 당시 86세 노모에 대한 연민과 불효스런 지난날에 대한 참회를 빌어 권력자들이 충효윤리로 독재체제를 굳히려는 데 대한 항의를 담았다.

이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던 1977년 12월 28일 새벽 그 노모가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이씨는 본의 아니게 불효를 저지른 셈이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김사장이 저자에게 2년형을 안겨준 '우상과 이성'을 다시 살리기 위해 잘라낸 문장은 모두 2백자 원고지 1매 분량이었다고 한다.

김언호 사장은 "이 선생의 책은 한길사가 80년대에 사회과학 서적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10만부 가량 팔렸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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