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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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스페인의 풍경은 하나도 낯설지않다. 꺼칠꺼칠한 산하며, 올망졸망한 집들은 꼭 한국을 옮겨다 놓은것 같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기후마저 어찌 그리같은가.
스페인에 관한한 한가지 궁금한것이 있었다. 10년전 「프랑코」총통 사후, 으례 쿠데타가 일어났을법한데 오늘까지 조용하다. 그동안 외신은 먼 구름을 보고 일기예보라도 하듯 쿠데타 임박설을 여러번 타전했었다.
오늘의 스페인엔 어디에도 그런 음산한 예감이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열심히 떠들어대고, 열심히 마시고 먹고, 일심히 사는것 같았다.
「플라자 데 에스파냐」, 마드리드의 한가운데에 있는 이 「스페인광장」엔 저녁이면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여든다.
마드리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 대학생이 여자친구와 앉아있는 벤치에 끼어들었다.
문제의 관심사를 화제로 삼았더니 이 대학생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돈·키호테」 동상을 가리켰다. 우스꽝스런 모습이라니, 눈으로 보는 소설그대로였다.
오늘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 아마 저모양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청년은 이런 익살도 들려주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법석거리는 명일 가운데 하루는 「F23」 이라는 날이다. l981년 2윌23일.
바로 그날은 스페인의 민병대 2백여명이 한 중령의 인솔로 총질을 하며 의회(하원)에 난입했던날이다. 쿠데타기도였다. 물론 쿠데다는 불발로 끝났다. 9명의 군구사령관중 한명의 호응밖에 없었다.
그 「F23」을 스페인 사랍들은 「돈·키호테」가 행차한 날쯤으로 여긴다. 실컷 비웃어대며 마시고 떠들어대는 명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심리적 배경이 무엇일까.
첫째, 국민소득이 4천달러쯤(84년 3천7백4달러)되면 중산층이 조용한 다수를 이룬다. 그것은 마드리드교외의 신흥주택가와 임립한아파트군을 보아도 알수 있었다.
둘째, 중산층을 배경으로한 정치는여유가 있다. 이를테면 우파에도 정권을 주어보고, 좌파에도 그 바통을 넘겨주는 탄력이 있다. 지금의 집권당인 사회노동당 당수인 「곤살레스」수상은 「가식없는 장미꽃」을 심벌로 삼을만큼 모가 없다. TV에 등장한 그의모습은 좌파 정치인의 히스테릭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째, 스페인도 이제는 유럽의 일원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내년 1월1일부터 EC회원국이 된다.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도덕적 책임감. 더구나 세계의 관광객이 해마다 인구(3천8백만명) 만큼 몰려온다. 그것도 쿠테타를 「돈·키호테」의 행차로 보이게 하는요건이 된다.
스페인의 정치적뿌리는 역시 임금이였다. 국왕 「카를로스」1세는 군의 힘을 집약시켜 주는 상징적 불변의 존재다. 국왕은 또 자신의 권능을 지탱해줄 군을 필요로 한다. 군은 응석을 부릴 대상이 있고, 왕은 또 그것을 정중히 받아준다.
그러나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마지막보루는 『이제 내란은 그만!』하는 그래스루트(민초)들의 간절한 원망이다. 먹고 살만하다는 얘기다. 【마드리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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