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 폭락…「미국 경제」가 초조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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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런던 시내 스틀랜드로에 위치한 미국계 시티뱅크의 직원들은 요즘 한결 풀이 죽은 모습들이다.
밀려들던 고객들이 눈에 띄게 뜸해졌고 그나마 찾아오는 손님들은 그동안 맡겨 두었던 달러 예금을 인출해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버클리나 로이드 등 영국계 은행들은 손님의 발길이 잦아졌고 예금도 급증, 은행원들 얼굴엔 희색이 완연하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달러가 폭락으로, 떨어지기만 하던 파운드화가 폭등하는 등 곡예 하는 국제 통화의 양면 극이다.
은행마다 달러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싸늘해졌다. 냉대가 노골적이다.
달러를 갖고 와서 파운드나 다른 통화로 바꾸겠다는 사람에게 은행은 수시로 환시세 동향을 확인한 다음 불리한 환율을 적용, 환전해 주고 있다.
은행이 달러를 팔 때 적용하는 매도율에 비해 달러를 사들일 때 붙이는 매입 환율을 껑충 높여 적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종전엔 매도-매입율 간의 마진으로 0.05를 매겼는데 요즘은 0.08∼0.09를 매기고 있다.
지난 2월 말까지는 달러가 기세 등등한 반면 파운 등은 괄시를 받았었다.
음지와 양지가 완전히 바뀐 꼴이다.
작년 하반기 이후 가속화된 이 같은 외환 시장의 곡예는 미국 달러를 주역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이 때문에 국제 통화-세계 경제의 불안은 가중되고 있다.
긴축 통화인 달러가 폭락을 계속할 경우는 큰 혼란이 닥칠 것은 분명하다. 오르기 만하던 달러는 지난 3월초 미국 오하이오주의 지방 금융 점포 부도 소식을 시발로 반락세로 돌아섰다.
달러는 지난 2월 25일 서독 마르크에 대해 은행 매입율 기준 1대 3.45 (1달러당 3.45마르크), 영국 파운드에 대해선 3월 5일 1파운드 대 1.05달러로 거의 맞상대하는 수준까지 올라가 피크를 기록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1달러당 3마르크로, 그리고 1파운드당 1.3달러로 급락했다.
한달 반 사이에 파운드에 대해 24%, 마르크에는 12%떨어졌고 다른 통화에 대해서도 10%안팎의 하락을 기록했다.
달러화의 폭등·폭락은 은행이나 투자자들에게만 국한하질 않고 즉각적으로 국제 통화와 무역에 파급되고 수출입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
요즘의 달러 하락은 훨씬 오래 전부터 우려되었던 일로 그것이 현실화 된 것이다.
달러의 폭락, 파운드 등 유럽 통화의 상승은 몇 가지 배경적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우선 드러나기 시작한 미국 내 금융기관의 경영 취약이다.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 받은 예금을 갖고 돈 장사하던 금융 점포들이 속속 부실화되었는데 특히 값싼 수입 물품 때문에 많은 산업이 도산함으로써 문제는 심각해졌다.
다음은 막대한 미국의 재정 및 무역 적자에서 드러난 미국 경제에 대한 신인도의 저하다.
미국이 브라질·멕시코를 앞질러 세계 최대 부채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되어 있다.
고금리와 달러 강세 때문에 미국 수출 산업의 대외 경쟁력이 현저하게 악화된 것도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이다.
영국 파운드가 다른 통화보다도 큰 폭으로 오르는 것은 그동안 너무 떨어졌던데 대한 반등이기도 하지만 고금리와 정부의 반 인플레 긴축 정책 때문이다.
영국의 금리는 현재 연 13%로서 인플레 율보다 약 8%포인트나 높다.
높은 금리를 좇아 파운드에 투자하는 국제 부동 자금이 최근 크게 늘어났다.
달러의 폭락이 시작되자 금투기가 되살아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1온스 당 2백 80∼3백달러를 유지하던 국제 금값은 달러 급락에 반비례, 오르기 시작해서 지금은 3백 30달러 선에 거래되고 있다.
최근의 달러 하락이 그동안 너무 울라 과대 평가된 데 대한 정상 복귀의 자율 조정인지 아니면 국제 통화 체제의 혼란을 몰고 올 붕락까지 갈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낙폭이 너무 크고 심리적 달러 이탈 현상이 확산되는 등 미국으로선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지난 2월까지도 외환 시장 불개입을 천명했던 미국 정부가 간섭 필요성을 시사할 정도로 태도를 바꾸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달러화의 불안 문제는 17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린 IMF(국제통화기금) 잠정위회의의 핫 이슈로 제기되고 있는 것도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다.
【런던=이제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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