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실」정리-어디부터 손대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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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과거의 잘못과 책임이 어디 있든 간에 부실기업문제는 현실적으로 국민부담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는 딱한 형편입니다. 상처가 더이상 넓고 깊게 번지기전에 서둘러 손을 쓰는 것이 그나마 국민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입니다』(김만제 재무장관)
『국민들이 꼭 부담해야할 것이라면 세금을 더 내서라도 부실기업 문제를 해결해야지요. 그러나 저간의 잘잘못과 책임소재는 명백히 가려야 부담하는 국민들도 납득할게 아닙니까』 (이민우 신민당총재)
부실기업문제에 대해 정부와 야당의 시각차이를 엿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부실기업 문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화급한 당면과제라는 점이다.
이처럼 일이 어렵게 되었는데도 『부도를 내야한다』는 원칙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워낙 부실의 덩어리가 큰지라 그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은행부도가 겁나서다.
해당 은행들의 자본금을 모두 합쳐야 1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데 반해 이들의 부실채권은 4조원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총 통화량의 5분의1수준이다.
작년10월말 현재 5개 시중은행과 외환은행·지방은행 등이 물려있는 부실채권 액수는 3조9백88억원. 이중에 완전히 떼인 돈이 2조4억원, 떼인 것이나 다름없는 돈이 4천1백25억원, 그렇진 않다 해도 이자를 한 푼 못 받고 잠겨있는 대출이 1조5천71억원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도 상당히 줄여 잡은 숫자들이다.
만성병동인 산업은행의 부실채권까지 치면 훨씬 커진다.
부실기업에 섣불리 손을 못 대는 것은 이처럼 은행들이 잔뜩 들어있는 까닭이다.
『작년의 경우 대출하는 돈의 60∼70%가 구제금융이었습니다』(모 은행장)
부실기업을 부도내지 않으려니 어쩔 수 없이 계속 뒷돈을 대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은행은 있으되 「금융」의 부재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고 보면 가장 심각한 부실산업은 문제의 해외건설이나 해운회사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융산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국민부담은 결국 한국은행에서 돈을 찍어서 대주거나 아니면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두 가지 다 동원해야겠다는 것이 정부생각이다.
우선 최근 재무부가 발표했듯이 조세감면규제법을 고쳐 부실기업정리에 부담이 되는 세금을 대폭 감면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카드는 특별융자제도의 신설이다. 3%의 낮은 금리로 한국은행이 일반은행들에 자금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말이 자금지원이지 사실상 거져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금 면제를 통해 부실기업정리를 수월케 하는 한편 인수기업들에 대한 자금지원이나 은행자신이 떠 안은 부실채권을 털어 주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돈을 대주겠다는 이야기다.
정부당국의 스케줄에 따르면 늦어도 금년하반기부터는 실천에 옮겨질 전망이다.
부실기업정리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 같은 제도적인 장치마련이 정치적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해도 산적해있는 부실들을 현실적으로 여하히 이 장치에 맞춰나가느냐가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원칙이 서야한다.
『산업정책면에서 우리경제가 안고있는 문제는 불황사업의 문제, 부실기업의 문제,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문제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혼돈해선 안됩니다. 불황산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야할 것이고 부실기업은 가급적 기업 스스로의 책임에 맡기고 재벌문제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선에서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나가야지요.』(구본영박사 부총리 자문관) 공교롭게도 이 세 가지 문제점을 모두 지니고 있었던 표본이 바로 최근의 국제정리작업이었다. 그러나 막상 어느 한가지 원칙에도 충실치 못한 케이스였다. 계열기업 중에 부실한 것들은 모두 끼워팔기식으로 떠넘겼고 개중에는 인수기업이 피인수기업보다 더 부실한 경우도 있었다. 사양산업의 하나라던 신발을 마찬가지 형편에서 업종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합섬회사에 갖다 붙였으며 한편으로는 큰 기업을 오히려 더 키워놓았다는 점에서 경제력 집중 완화정책을 정부 스스로가 포기하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어차피 부실기업을 다른 기업에 인수시킬 바에는 충분히 능력이 있는 기업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같은 원칙이 대기업의 경제력집중 방지와 배치되는 경우가 많아 손쉬운 해결이 어려운 것입니다.』(모 은행이사)
사전준비 없이 사회적인 충격만을 우려한 나머지 무리하게 선인수를 서두른 데서 빚어진 부작용들은 이밖에도 곳곳에 엉겨져있다.
세금감면이나 저리특융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장치임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이처럼 정리과정에서 기술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국민부담의 증감이 크게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제도적 장치가 부실기업에 대한 상당한 특혜를 보장하는 것인 만큼 적용대상을 가급적 최소화시켜야 한다. 충격만을 우려해서 무더기로 끼워팔기를 할게 아니라 어느 정도 부도낼 것은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칫하면 부실기업을 무리하게 떠 안은 건실한 기업마저 부실화될 가능성도 있다.
부실이 심한 업종은 이미 드러난 대로 해외건설·해운·종합상사·합판 등을 꼽을 수 있다. 해외건설의 경우 경남·삼호·남광 등의 큰 덩치들에 대한 떠넘기기 작전이 작년부터 시작됐고 앞으로도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부실규모면에서는 해외건설에 못 미치나 가장 어두운 쪽이 해운업이다. 장부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전체 빚이 4조원 수준으로 파악되고 있다.
해운사업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를 다시 하지 않는 한 부분적인 처방으로는 회생불능인 상태다.
이밖에 또 한차례 정리를 기다리고 있는 합판을 비롯해 고무업종 등도 「시간문제」로 다가서고 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더 이상 지고 갈 수 없는 짐들이다. 어차피 형평을 기대하기는 틀려버린 상황이다. 남은 문제는 얼마나 피를 덜 흘리면서 원만히 수술을 해내느냐 하는 것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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